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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일 중독’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깨어난다
어느 날 자정이 가까운 시간, 집으로 가는데, 마침 학원이 끝났는지 고딩 아해들이 쏟아져 나온다. 늦은 시간임에도 아이들은 특유의 활력으로 끼리끼리 모여 재잘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진다. 명랑한 발걸음에 묻어나는 그림자가 언뜻 희미해진다. 누가 이들을 이 야심한 시각까지 가방을 메게 하였는지, 괴괴한 어둠은 답하지 못한다. 그나마 젊음이 아니었더라면, 저 골목은 또 얼마나 추레해질 것인지, 도심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봄과 가을이 실종된 요사이, 급기야 칠월에 들자 한증막이다. 도심속 유리 안에서 바라보는 가로수도 더위에 지친 듯 한 낮의 햇살에 포박되어 버린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니 우리는 책상을 모시고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퇴근길 어디에서도, 가정에서도 늘 책상을 몸 한켠에 박아두고 사는 셈이다. 산다는 것이 팍팍하지 않을 때가 있으랴만, 가뜩이나 비정규직 고용 문제 등으로 노사정의 대치가 엄혹한 시국이니, 걸음걸음마다 살폿한 벼랑길에 놓여있는 격이다.
거추장스러움 벗어던지고 만나는 쌩얼의 시간들
이러할 때 휴식을 얘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투잡으로 뛰어도 비파소리만 요란할 뿐, 삼베적삼에 방귀 빠져 나가듯 돈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요즈음, 휴식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가. 쉰다는 뜻의 휴(休)자를 파자해보면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이렇게 쉬는 것은 예로부터 숲이나 계곡이나 산자락 같은 자연과 함께 있음을 뜻한다. 어떠한 치장이나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던지고 만나는 쌩얼의 시간들을 휴식이라고 한다면, 시멘트와 콜타르로 이·삼중 코팅한 도심을 사는 현대인들은 좀 불행하다.
이점에서 휴식 혹은 여가 사회학이라는 말도 나올법하다. 오랜 기간 유지됐던 농업기를 거쳐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콘베이어 벨트가 숭배 받던 시절, 바캉스 철을 맞아 일제히 바다를 찾는 인파로 길목이 메워지는 장면이 지구 곳곳의 풍속도로 뉴스거리가 되었거니와 이제는 속도와 효율성의 네트워크를 따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순기능을 결합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이종 격투기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에 올수록 이전보다 행복하다! 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핵심은 어느 시대이고 인간의 행복지수가 어떠한가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행복한가. 조금 일반화하여 나의 시대는 아버지의 시대보다 더 행복한가. 정답이야 있을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현대로 올수록, 도심의 햇빛을 받는 빌딩이 높아질수록 그 뒤의 그림자도 함께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슬로우 시티, 느림의 미학 등 현대의 주류 트렌드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도 많은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이는 동시에 그동안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심·신 모두를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했다는 반증일 수 있겠다.
책상과 컴퓨터를 떠나라
여기서 짧게나마 우리가 처한 노동환경을 살펴보자. 갈수록 ‘일중독’이라는 말이 많아지고 있는 요즈음, 대한민국은 여러모로 피곤하다. 주요 22개국의 평균노동시간인 1,701시간보다 약 40%가 더 많은 2,380시간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과 함께 OECD 국가 중 산재 사고율이 가장 높은 연간 8만 8,000여건, 사고사망률만도 2,300여건이 넘는(강수돌 著, 일중독증 벗어나기 안전불감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경제침체로 인한 구조조정의 공포로 안팎으로 어얼리 버드, ‘일 권하는 사회’로 급속하게 재편 중이다.
그런가하면 어느 취업사이트의 조사결과(2007년 12월) 대한민국 직장인의 51%는 자신을 일중독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중 30대는 61%로 "퇴근을 하면서도 처리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계속 머리 속에 남아있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일이 나타나는..."식의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더 심해져 직장인들의 최근 3개월간 사내 컴퓨터 이용실태를 분석한 결과 직장인들의 업무시간외 컴퓨터 사용비율이 37%로 전년도 11%의 3배였고, 법정 휴무일인 토요일에도 22%로 작년의 4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가 이정도 되니 이젠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것이겠다. 이제는 마음 편하게 쉬는 방법도 배워야 하는 시대에 온 것일까. 문명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망은 앞으로 후진들의 눈 밝음으로 분석, 대치하면 될 터이지만 요사이 우리의 쉼(휴식)은 무엇인지, 혹은 어떻게 쉬어야 고달픈 일상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찌개백반이 될 터인지가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일찍이 “노세 노세 젊어 노세”란 금과옥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도처에 놓인 것이 방전된 배터리이니, 요샛말로 그 무슨 창발성의 업무효율을 높일 것이며, 아울러 삶의 질 같은 것이 얘기될 요량이 있을 것인가.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기왕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이야기도 있는 터이고, 논어 옹야(雍也) 편의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知之者不如好之者),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명구도 있는 바이지만, 갈수록 우리의 휴식형태는 남루해진다. 놀기 위해서도 줄을 서야하고, 경제적 부담도 늘어난다. 예전에는 먼저가면 임자였던 계곡이거나 나무그늘 밑도 이제는 평당, 좌대당 비용이 투입되고 예약이 돼있기 마련인 척박한 자본의 시대, 매미울음 소리 들으며 발을 담그던 호시절도 이젠 다 옛날의 이야기이다.
노동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워진 요즈음, 애오라지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 존재할지 모르겠다. 크든 작든 일터에서 따라온 고민들로 간만의 나들이는 헛갈리기 십상이고, 지금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조바심을 확인하는 여정이 오늘날의 휴식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생존을 담보로 작동되는 시대는 그것이 언제이건 야만의 시대이리라.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낭자한 시스템에 익숙해졌다는 것 외에 우리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을 두 손 놓고 바라보았다는 것 밖에는. 그리하여 이젠 편히 다리 뻗을 공간도 마음도 없어졌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할수록 마음 열어놓고, 쉬자. 불편해도 쉬자. 쉬다보면 놀게 돼 있다. 따지고 보면, 노는 것도 일인 셈이니 놀다보면 새로운 영감이 툭툭 터지게 돼 있다. 저 밑바닥에 외따로이 남겨있던 무언가가 깨어난다. 깨어나고 열리고 새롭게 어울려 가는 것이다. 하여 습관성 지루를 과민성 조루로 바꾸어 가는 것, 그것이 휴식의 요체라 할 것이다.
최삼경 | 본지 편집위원
문화통신 계간지 2009.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