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은둔선비의 삶터
하얀 너럭바위, 청옥물결 별천지 계곡 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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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막상 길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춘천에서 곡운구곡까지는 1박2일이면 될까, 2박 3일은 걸리지 않을까? 찻길 말고 옛길로, 마을 안길로 찾아가는 길은 없을까. 궁리만 무성하던 차에 월하(김혜숙·화가)를 만나면서 우리들의 첫 걷기여행은 시작됐다. 6월 14~ 15일, 회비는 1인 5만원. 결정되자 진행은 일사천리.

6월14일 오전 7시 반, 부슬비가 내렸다. 덕두원에서 방동리로 넘어가던 옛길을 찾아  덕두원2리에서 다리를 건너 들어간 산은 오디가 한창이고 산딸기도 무르익어 즐거운 여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속엔 낙엽송 숲길과 절터였던 곳으로 짐작되는 넓은 돌담이 있는 곳도 나타났다.
산을 넘자 서너 채의 집터가 있던 자리엔 머위가 무성했고 푸른이끼를 두른 계곡이 뻗어있었다. 조금만 도심을 벗어나면 이런 아름다운 산속이 있다니, 감탄하며 산을 내려서자 과수원집이 나타났다. ‘혹시 되돌아 온 것 아닌가?’ 삼악산 뒷모습을 보며 월하가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가 어디예요?” 동네 이름을 묻자 “새수골”이란다. 덕두원 입구다. 우리가 건넜던 첫 번째 다리가 아니고 바로 위 다리를 건너야 했단다. 그러나 2시간 30분이 아깝지 않은 길이었다.

옛길 그대로인 수레너미고개
예전 석파령을 넘은 춘천 부사는 덕두원에서 쉰 후 수레를 타고 방동리로 나와 금산리에서 배를 타고 춘천읍내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터는 정확지 않으나 춘천부로 부임하는 부사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가 바로 수레너미다. 수레가 넘나들었다는 고개 입구는 수레길이었을 법하나 산자락 계곡을 건너면 이내 형체만 어렴픗한 오솔길이다.
덕두원에서 방동리를 가로막은 산 하나를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서면 어느 마을이 나타날까 설레임에 벅차다. 비가 개면서 숲속은 환해지기 시작했다. 고개 밑에는 농익은 그루딸기와 앵두가 한창이라 배를 채웠다.
내려간 곳은 당산길. 감자꽃이 한창인 마을길에는 방동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옥포해전 등을 승리로 이끌며 전쟁을 치르다 전사한 한백록 장군(1555~1592) 묘역 정문이 있다. 상상길로 나서면 위편에 신숭겸 장군 묘역이 보인다. 묘역까지 1시간 반 정도면 닿는다.

월송리 아담한 석탑과 반송저수지
월송리-3층-석탑.gif 푸른 들판 사이엔 검은 삼포막이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어느 곳이건 인삼밭이 즐비하다. 장미꽃이 화사한 산골집 마당은 개들만 지키고 있을 뿐,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어쩌다 마주치는 어르신들은 “어디서 왔수. 이 더운데 어딜 가우.” 말문을 튼다. 그런데, 예전엔 길을 물으면 먼 거리도 “저기, 조금만 가면 되우.” 했었는데, 이제는 “그리로 가려면 한참 걸어야 되우. 아주
먼데.”라는 답변이다. 이웃마을도 한걸음에 넘나들던 시절엔 가까운 거리였으나 고개와 언덕 대신 자동차길로 소통하면서부터 걷는 길은 멀어져 갔다.
방동2리 샘골길에서 월송리로 넘어가는 길은 한낮에도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우거진 숲속 길. 논두렁을 타고 마을로 내려오면 한적한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빠알간 보리수 열매와 새까만 버찌, 오디들이 어디에나 한창이다. 월송 2리 마을 윗집 마당에는 아담하고 앙징맞은 3층석탑(강원도문화재자료 제9호. 지면 1.5m)이 있다.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길이나 옛모습이 잘 보전된 자그마한 석탑은 6백~7백년 전의 이곳 모습을 상상케 해 준다.
월촌과 반송리가 합쳐 월송리가 된 이곳의 반송저수지는 초록수풀 그림자와 하늘을 담은채 낚시꾼들을 부른다. 1957년 만들어진 저수지는 넓은 몽리면적을 자랑한다.

삶의 풍경 엿보이는 마을 안길
월송리 마을길을 나와 서상리로 가면 예전 골미나루로 잘 알려졌던 자양강가 골미길이 나온다. 강 건너 용산리는 배로 건너 다디니던 이웃마을이었으나 춘천댐(1965년)으로 막히고 다리를 건너 돌아가야 한다. 이 골미길 끝자락에 서상리 3층 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16호, 높이 3.2m)이 있다. 개망초 하얀꽃들로 기단이 뒤덮인 의연한 석탑은 예전 강가의 양화사를 떠올리게 해 준다.
춘천 시내의 칠층석탑, 당간지주와 함께 월송, 서상리의 3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너편에는 춘천의 사액서원이었던 문암서원이 있었던 곳. 신매리의 도포서원과 함께 북한강가 학맥을 이어가던 곳이다. 오늘날 서면의 박사마을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2번 춘천유람을 했으나 모두 강길을 따라 배로 왕복했다. 문암서원에 들러 하룻밤을 머물며 글을 남겼고, 곡운서원까지 다녀간다. 다산의 생가가 양수리 두물머리에 있으므로 자연히 육로보다는 배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춘천행을 소설가 김도연은 『춘천 가는 배』로 재연해 냈다.
덕두원에서 방동리로 통하던 옛고개 수레너미를 넘어 방동 1, 2-리, 월송 1, 2, 3-리, 서상리의 골미길을 잇는 서면 마을 안길 걷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7~8시간). 소박한 삶의 풍경을 엿보는 마을길 걷기는 고갯길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식사는 방동리에서 가능하며, 마을 안에서 수퍼 등은 찾기 어렵다. 서상리에서 원평리 입구까지는 차편 이동.

사라져 가는 것들
38선-표지석.gif 휴전선이 되었던 38선을 가끔 마을 중간에서 만나게 된다. 이제는 6.25 동란 때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묵묵히 증언할 뿐이다. 사북면 원평리 입구 길가에는 38선 표식이 덩그라니 남아있다.
마람또리(馬坪里)로 불리던 이곳은 서울의 장수들이 말을 많이 매고 유숙했던 곳. 몇 해 전까지만 해도 38선에 위치했던 농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38선에 집이 갈려 웃방에 거주하던 며느리는 여맹위원회에, 안방에 거주하던 시어머니는 남한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민족사의 현장이던 이곳 56번 도로에서 오른편 길로 접어들면 춘천호의 백미를 만끽할 수 있는 원평리 길이다. 낚시꾼들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산줄기를 끼고 쪽빛 호수가 펼쳐진다.
원당리와 마평리가 합쳐 원평리가 된 이 마을은 예전 화천으로 가던 옛길이 있었던 곳. 춘천댐이 생기면서 길은 물속으로 사라졌고 오지가 되었으나, 들머리에서 시오리는 포장이 되었고 신포리로 나가는 십여리는 아직 비포장도로다. 모진강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춘천호 물이 줄면 초입의 고개에서는 모진교 교각이 보인다는 곳이다. 

가마솥에 물 데워 샤워
원평리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의 민박집. 그런데 샤워를 할 수 없단다. 더운물이 안 나온다니…, 빗물에, 땀에 절은 저녁에 시원하게 씻고 휴식을 취하려던 꿈이 깨지려는 순간, 아주머니가 미안한 듯 한마디 하신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줄 수는 있는데….”
어둠이 내린 마당가 가마솥에 불을 지펴 물을 덥히고 오가는 사람 없는 산골집 마당가에서 찬물과 섞어 끼얹으니 먼 추억여행으로 빠져든 듯 상쾌하다. 달밤은 아니었지만….
강 건너 가일리를 바라보며 신포리로 나가는 비포장 길은 한적하다. 길 아래에는 빙개(한여름 빼고는 얼음이 녹지 않는 강가 벼랑)가 있고 길이 끝나며 건너는 곳이 연적개울(건천으로 물이 마를 때가 많은)이다.

버스보다 빨랐던 잔잘고개
잔잘고개1.gif 신포리 마을길을 지나 지촌리로 나가면 마을 끝에 샘 이용원이 있다. 맞은편 길은 포부대(현재는 빈 터)로 가는 길, 초소 옆길로 접어들면 잔잘고개로 넘어가던 곳이다.
잔잘고개를 알려 준 민박집 성기삼 前이장(74)은 “예전에 비포장 도로일 때는 지촌리를 출발하는 버스를 보고 냅다 잔잘고개를 넘으면 버스보
다 먼저 오탄리에 닿았다.”고 한다. 산자락을 에둘러가는 신작로 보다 산을 넘는 고개는 지름길이다. 짐을 지고도 40분이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초행인 사람들에겐 가파르다.
자취만 남은 푸서리길을 헤치며 마루에 올라서자 능선으로 임도가 가로질러 나 있고 헬기장 표시가 있다. 당연히 맞은편 길로 내려갔으나 길은 오리무중. 한참을 숲속행군을 하다 찾은 길을 따라 내려오니 마을 들머리로 떨어진다. 1시간이 훨씬 지났다.
이곳에서 길 건너 마을안길을 따라 폐교가 된 오탄초등학교를 지나면 오탄슈퍼가 나타난다. 우리가 잔잘고개를 넘어왔다고 하자 수퍼 주인인 우경섭(56,오탄1리 前이장)씨는 “예전 신포중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이 통학하던 고개였지요, 비포장도로를 자전거로 가는 것 보다 빨랐지요. 합승(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았고 차비도 내야하니 학생들은 고개를 넘었지요.” 한다. 지금은 50대 중반이 된 이들이 30분이면 넘어 다니던 통학길이었단다. 이용하지 않는지는 25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우 씨는 또 잔잘고개를 넘어 마을로 나오는 장승백이가 주막터였으며, 잔잘고개-하고개 -진벌구-사창리로 연결되던 우마차길이 부분적으로 끊기기는 했지만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별천지 계곡 ‘곡운구곡’ 속으로
우리나라 조선 중기 은둔 선비의 삶터를 보여주는 곡운구곡은 곡운 김수증(1624~1701)이 당시의 ‘예송논쟁’에 형제들이 휘말리자 성천부사를 사임하고 찾아 든 곳이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화음동정사가 있던 이곳은 당시 선비들의 이샹향이었다고 한다. 곡운정사기를 썼고, 당대 화가 조세걸이 그린 화첩 ‘곡운구곡도’가 국립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곡운서원이 있던 곳이다.
오탄리에서 곡운구곡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물론 오탄천의 시원한 물길이 따라붙긴 하지만 발바닥도 아프고, 차량도 꽤 지나다녀 멀게만 느껴진다.
제3곡-신녀협과-청은대.gif 드디어 제1곡인 방화계가 나타났다. 봄철 철쭉에 홀려  천렵을 왔던 곳이다. 당시는 이름을 모른 채, 사창리 계곡이라 불렀다. 1곡은 춘천 쪽에 있다. 1곡과 2곡(청옥협)은  3.1㎞로 꽤 먼 편이다. 2곡 못미처에 요기를 할 수 있는 용담쉼터가 있다.
다행히 계곡마다 표시석에 곡운과 아들, 조카, 외손 등 아홉 명이 매곡을 읊었다는 시가 있어 지루함을 달랜다. 구곡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하는 3곡과 4곡은 계곡을 메우는 너럭바위가 장관이다. 3곡인 신녀협은 곡운이 평소 흠모하던 김시습의 호를 따 명명했다는 청은대가 있다. 이곳에서 사창리까지는 3㎞. 왼편 송정교를 지나면 계곡길을 따라 구곡까지 이어진다. 3곡에서 9곡까지는 3㎞. 구곡 왼편의 삼일계곡에는 화음동정사가 있다.
9곡까지 둘러보고 되돌아오는 길에 계곡 바윗길을 바람처럼 걸어가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스님인 듯한 그분을 보고 ‘스님과 두 여자’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길 아래로 내려갔더니 스님은 온데 간 데 없고 4곡의 너럭바위길을 걸어 볼 수 있었다.
춘천에서 곡운구곡까지는 110리 정도(덕두원-원평리로 돌아갈 경우 130여리). 자가용이나 버스(춘천 -사창리 하루 11회, 40여분 정도)를 이용할 수 있다. 도보여행일 경우 덕두원 수레너미 고개, 서면 안길 등을 거쳐 원평리에서 1박, 잔잘고개를 넘어 구곡까지 둘러보는 1박2일이 가능하다.
        

신용자 | 본지 편집위원장

 

문화통신 계간지 2009.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