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화통신의 눈
북한강 유역의 문화적 지형도 속에 춘천이 등장하다
이자현(1061∼1125)이 1083년(문종37)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1087년(선종4) 태악서승을 끝으로 벼슬을 그만둔다. 2년 뒤인 1089년(선종6) 세속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춘천 청평사로 들어간 이래 그가 타계하는 65세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햇수로 37년 동안을 청평사에서 은거한 셈이다. 「고려사」에서는 그의 성품이 인색하고 재물을 많이 쌓아놓아서 춘천 지역 농민들의 미움을 받았노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말처럼, 그가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골을 찾아 들어와 흔적 없이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다 갔다면 「고려사」의 사관(史官)이 잘못 평가를 한 것은 아니겠는가.
적어도 한 시대를 울리는 사람이 자신의 생활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동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을 만들어왔던 문화적 환경 자체가 그대로 옮겨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임금도 사모해 마지않았던 이자현이라고 하는 개인을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 기록에 의하면 이자현은 유교, 불교, 도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특히 도교와 선불교에 뛰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하나의 학문 분야에 집착했던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풍류가요 시인이었던 예종이 곽여(郭輿)와 함께 너무도 총애했던 이자현이고 보면, 춘천으로 이주해 온 그의 행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북한강의 문화적 지형도 속에서 보자면 그의 청평사 은거는 적어도 이 지역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킨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개경의 문화적 자장 안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대접을 받던 이자현이,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온다는 것은 지역 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자현의 시대는 고려의 문화가 난숙기에 접어들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때였다. 예종 자신은 뛰어난 한시 작가이기도 했고, 향가의 형태를 지닌 고려가요 「도이장가(悼二將歌)」의 작자이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시를 주고 받으며 풍류를 즐겼던 풍류남아이기도 했다. 그는 송나라에 사람을 보내 대성악(大晟樂)을 수입해 오기도 했으며, 도교를 배워오도록 조치한 뒤 궁중에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을 만들어서 종교로서의 도교를 공식적으로 수입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시기야말로 고려의 뛰어난 한시 작가들이 대거 출현해서 성대한 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자장의 한가운데서 궁궐 출입을 무상으로 할 수 있는 자격을 임금으로부터 직접 부여 받았던 사람이 곽여라면,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 바로 이자현이었다. 두 사람은 당대 도교적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자현의 문화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낙도음(樂道吟)」이 있다.
家住碧山岑 집은 푸른 산봉우리에 있는데
從來有寶琴 예부터 보배로운 거문고 있다.
不妨彈一曲 한 곡조 연주해도 무방하지만
祗是少知音 단지 소리를 알아줄 사람 적어라.
애석하게도 이자현의 저작이 전하지 않아서 그의 사상이나 문학적 면모를 알 수는 없다. 게다가 그의 한시 작품으로 전하는 것은 두 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이자현의 문학적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점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쉬운 글자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경계를 표현해내는 수법이 뛰어나다. 산 속에 살면서 보배로운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문제는 그 깨달음의 경지를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음’은 옛날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백아(伯牙)의 연주를 잘 들었던 종자기(鍾子期)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알아주는 벗을 지칭하는 단어다. 이 작품의 사상적 경향을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도가적 분위기를 더 많이 풍긴다.
그러나 이자현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도교적 경향보다는 불교적 태도 때문이다. 그의 불교적 입장은 선(禪)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그러한 생각이 청평사에 은거하면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인로(李仁老)는 자신의 저작인 「파한집(破閑集)」에서 이자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선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여, 배우는 사람이 오면 문득 그와 더불어 깊숙한 방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 말을 잊었다. 때때로 옛 고승들의 종지를 들어 깨우치니, 이로 말미암아 심법(心法)이 고려에 퍼지게 되었다. 혜조국사(惠照國師)와 대감국사(大鑑國師)도 모두 그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당대 최고의 선승들이 함께 어울려 노닐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배우려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 개경이 수도였던 시절, 과연 사람들은 이 깊은 산중까지 어떻게 왔을까. 고려의 역참(驛站)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경로로 개경과 춘천을 오갔는지 재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양에서 북한강 뱃길을 이용하여 춘천으로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종은 이자현이 은거한 뒤 그를 위해 차와 향, 금, 비단 등을 하사하였다. 또한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서 불렀지만 이자현은 한 번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 개경 성문을 나서면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노라 맹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들이 만난 것은 예종이 한양에 갔을 때였다. 예종이 남경에 머물면서 이자현의 동생 이자덕(李資德)을 보내서 만나기를 청하자, 이자현은 마지못해 예종에게 간다. 예종은 삼각산(三角山) 청량사(淸凉寺)에서 이자현을 만나 수양의 요체를 물었고, 그에 대해 ‘탐욕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수양’이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이자현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한양까지 갔을까. 조선 시대처럼 춘천과 한양 사이의 관도(官途)가 발달해있지 않았을 시절, 가장 빠르고 편한 것은 역시 배로 이동하는 것이었으리라. 예종과의 만남을 다룬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자현이 북한강을 통해서 한양과 춘천을 오갔으리라는 하나의 방증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김풍기│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고전소설 문학과 한시 문학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삼라만상을 열치다', '옛시 읽기의즐거움' 등이 있고 '옥루몽','윤지경전','열하일기'등을 번역한 바 있다.
문화통신 계간지 2009.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