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화통신의 눈
북한강유역의 학맥을 찾아서 ②
강물따라 형성되는 학맥
강 옆으로 마을이 만들어지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인다. 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퇴적층이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주니 곡식이 잘 자란다. 수해 때문에 강물 바로 옆으로 집이나 마을이 들어서는 것은 아니지만, 강을 굽어보는 기슭이나 언덕 즈음에 사람들은 집터를 잡기 일쑤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그것을 경제의 기본 단위로 하는 농경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도시에 비해 느리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운행에 따라 살아가고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급격한 변화는 위험 신호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자연의 움직임이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랫동안 전해오는 운행 질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흐름을 예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변화의 폭이 적다면 그 예측은 상당한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다. 게다가 꾸준하면서도 일정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촌 사회에서 사람들의 이동은 그리 달가울 리 없다. 사람들의 이동에서 이문을 취하는 상인들의 생활공간에 비해서 농촌사회가 비교적 변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 시대와 비교할 때 근대 이전의 교통수단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이동의 필요성이 절실했다면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명되었겠지만, 농경사회였던 조선으로서는 특별히 획기적인 교통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인적 교류는 자연히 줄어든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평생 동안 벗어나지 않고 일생을 마치는 일이 허다했던 당시로서는, 한 개인이 멀리 이동하게 되는 계기는 몇 가지로 한정된다. 다른 지역으로 혼인을 해서 가는 일이 아니라면 이따금씩 장을 보러 가는 일이 아마도 동네를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조금 활동적인 양반이라면 과거 시험을 보러 가거나 친인척의 행사에 다니러 가는 일, 혹여 몇 사람이 동반해서 여행을 가는 일이 고향을 벗어나보는 중요한 계기일 것이다. 관직을 받아 다른 지역을 다스리러 가거나, 드물지만 유배를 가게 된다면 그 또한 고향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날 일은 흔치 않다.
그들은 어떻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까. 가장 흔한 방법이 걸어서 가는 것이다. 마을과 마을을 지나서, 산과 강을 넘어 걸어 다니는 일이야말로 근대 이전의 교통수단 중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양반이라면 하인에게 견마를 잡혀서 말을 타고 가거나, 여성들의 경우 가마를 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수단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먼 길을 갈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거니와 때때로 위험한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산길에서 도적을 만나거나 천재지변으로 중도에서 고립되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수단이 가장 흔하게 이용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북한강 물길따라 속세를 비켜선 학인들이 모여드니……
그런데 큰 강을 옆에 끼고 있는 곳이라면 다른 교통수단을 생각할 수 있다. 바로 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수운(水運) 역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대까지도 이용되었던 북한강 뗏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강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만났다고 한다. 소용돌이나 암초, 예측할 수 없는 물살의 방향 등은 강에 위험이 상존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날씨가 괜찮고 수량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 주기만 하면 수운이야말로 최고의 교통수단이다. 걸어서 가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빠르기에 있어서도 다른 것보다 월등히 낫다. 중앙으로 보내는 지방의 특산물이 세금용 물건들은 대부분 수운으로 보냈던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양이 수도가 된 이해 북한강은 경기 북부와 강원 영서 지역의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서울과 그다지 멀지도 않으면서 속세에서 한 걸음 비껴 설 수 있는 곳으로 강원 지역이 각광을 받은 것도 모두 북한강 수운 덕분이다. 은거지로서 양주, 가평(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가평은 강원도 땅이었다), 춘천, 화천 등이 거론된 것은 아마 이 같은 사정 탓도 있을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학문적 깊이를 가진 학자가 사는 곳에는 자연히 공부하는 학인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제도 속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인들은 가문의 학풍과 학맥에 따라 좋은 스승을 찾아다녔다. 나무가 크고 높으면 그늘도 넓다. 학문적 깊이에 따라 그 그늘에 깃드는 학인들 역시 많았다. 서당이 되었든, 서원이 되었든, 혹은 스승의 은거지가 되었든, 유배지가 되었든, 배움에 목말라 있던 학인들의 발길은 도처에서 이어졌다. 그러면서 어른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학문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학문 공동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렇지만 과도한 해석은 일단 유보하자. 그냥 공부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만 우선 사용하기로 한다. 학문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신념과 학습 방향을 가지고 만들어진 일종의 학문적 동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함께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를 경책(警策)하는 과정에서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북한강 유역은 오랜 기간 동안 학자들이 기거하면서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던 곳이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학맥 혹은 학파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북한강 유역의 학문적 활동은 이전에 비해 훨씬 활기를 띤다. 그 이전부터 당연히 존재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조선 후기 들어서 많은 학인들이 오가면서 학문적 성과를 쌓는다.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록을 모아놓은 것은 없다. 오로지 개인 문집이나 관찬 및 사찬 지방지, 서원지 등에서 그 편린들을 모아서 조각을 맞추어 보아야 한다. 북한강의 학맥을 찾아보자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방치할 수만은 없다.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해 놓는다면, 다른 사람은 그것에서 출발하여 좀 더 좋은 자료와 글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쓰는 이 글은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
김풍기 (金豊起) |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고전소설 문확과 한시 문학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삼라만상을 열치다> <옛시 읽기의 즐거움> 등이 있고 <옥루몽(5권)><윤지경전> <열하일기(2권)> 등을 번역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