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강을 따라 학맥이 형성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가능하다. 그렇지만 학맥의 형성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부터 학문적 환경은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을 찾는 일은 지역의 문화적 토대를 확인하고 그 지층을 탐사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쉽지는 않지만 지역에서 전하는 기록과 개인문집, 각종 공문서 등을 활용해서 어떤 학문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선결 과제다. 지역사 연구의 세세한 부분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학맥을 연구하는 일은 너무 요원할 뿐 아니라 그리 큰 효과를 얻기 힘들다. 미시사와 거시사의 상보적 관계를 확보하는 일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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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확인하는 일로부터 북한강의 학맥을 공부한다 해도 대부분 사대부들의 활동에 방점이 찍힌다. 불교 및 도교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학맥’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근대 이전의 사대부 지식인들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북한강 유역에는 불교학의 흐름도 감지할 수 있다. 춘천의 청평사와 경기도 가평의 현등사를 우선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해본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춘천과 가평이 구분되지만, 예전에는 가평 역시 강원도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근대 이전의 지식인들에게는 근대 이후의 제도적 산물인 행정 구역을 통해서 활동 구역을 획정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크다. 그들은 자신이 접근하기 쉬운 지역을 우선으로 하여 학문적 교류를 하였으며, 설령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훌륭한 스승이 있기만 하면 그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성향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적 지식인인 스님들의 경우에는 수행처나 고승을 찾아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생활 방식 때문에 행정 구역이나 기타 인위적인 지역 구분으로는 쉽게 그들의 지역적 성향을 논단하는 것은 어렵다.

북한강 유역에서 불교적 학문 행위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점을 꼽자면 청평사를 우선 거론해야 한다. 이곳은 많은 수행자들이 스쳐 지나거나 한동안 주석하면서 공부를 하고 제자를 길렀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이들은 지식을 교환하거나 전승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한강 유역의 학맥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청평사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중들에게 청평사를 중요한 사찰로 인식시킨 계기는 고려 중기 이자현(李資玄)의 은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자현은 인주이씨(仁州李氏) 출신이다. 그는 고려 중기에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면서 외척으로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위 관직으로 나아가 세속적 욕망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자현은 도교와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세상을 벗어나 청정한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귀족 가문 출신들이 일반적으로 음서(蔭敍)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했지만, 이자현은 과거 시험으로 당당히 진출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학문적 바탕은 어느 정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자현 집안의 정치적 권력은 그의 조부 이자연(李子淵)으로부터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는데, 고려 정종-문종 연간에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한다. 그러다가 문종이 이자연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집안은 외척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자연의 아들이 이의(李?)와 이호(李顥)였고, 이의의 아들이 이자현과 이자덕(李資德)이다. 이자연을 비롯하여 이자량, 이혁유(李奕?), 이자현, 이자덕, 이예(李預) 등 이들 집안 인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는 ??고려사?? <열전(列傳)> 권95에 가장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자현은 과거 급제 후 태악서승(大樂署丞, 여기서 ‘大’는 ‘태’로 읽는다)을 지내던 중, 벼슬을 그만두고 춘천 경운산(慶雲山)에 있던 문수원(文殊院)으로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베옷 차림으로 불경을 읽고 선도(禪道)를 닦으며 지낸다. 그동안 어떤 연구자는 이자현의 은거에서 보이는 불교적 태도를 ‘거사불교(居士佛敎)’로 지칭하면서 고려 후기 불교의 중요한 흐름이 형성되는 계기로 보기도 했다. 또 어떤 연구자들은 이자현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문수원을 청평사로 이름을 바꾸고 주변의 자연을 활용하여 정원을 만들어 경영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정원이라는 점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구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논의되어야 하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나 해석에도 유의해야 하지만, 이자현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새로운 문화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자현이 개경을 떠난 뒤 예종은 신하를 파견하여 차와 향, 금, 비단 등을 보내주었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보내서 개경으로 불렀지만, 이자현은 자신이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 처지임을 강조하면서 왕의 요청을 거절한다. 예종은 그가 개경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훗날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에 들렀을 때 상서 벼슬을 지내던 그의 동생 이자의를 보내서 왕을 방문하도록 요청한다. 결국 이자현은 남경으로 가서 왕을 만나고 돌아온다.

이자현이 처음 왕에게 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 개경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경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왕을 만나러 간 것은 개경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를 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예종은 이자현의 은거 이전부터 그를 너무도 총애했던 터였다. 이자현과 함께 절친한 사이였던 곽여(郭輿)는 특별한 조치 없이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받아서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사람이다. 두 사람에 대한 예종의 애정은 대단했다. 그런 처지에, 왕의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한다는 것은 이자현으로서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예종 역시 이자현이 올 수 있도록 남경으로 부르는 배려를 했으므로, 두 사람은 결국 개경 땅이 아닌 남경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왕은 정치적으로도 유일한 권력자였지만, 동시에 문화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었다. 그런 왕의 지우(知遇)를 한몸에 받아 개경에서 활동하다가, 춘천으로 온 이자련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단지 이자현 혼자 자신의 몸뚱이만으로 왔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이자현이 누리던 중앙의 문화가 상당 부분 함께 전파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의 불교적 수행과 정원 경영 역시 그런 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김풍기 (金豊起) |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고전소설 문확과 한시 문학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삼라만상을 열치다> <옛시 읽기의 즐거움> 등이 있고 <옥루몽(5권)><윤지경전> <열하일기(2권)> 등을 번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