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길에 주목해야하는가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고,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길, 세상이 시작된 이래 길을 최초로 개설한 것은 고대 로마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전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개설하기 시작해서 2세기 까지 5백 년 동안 건설한 도로의 규모가 장장 15만 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길이라는 말이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의 향가에서였다. 신라 진평왕 때에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혜성가(彗星歌)」와 효소왕 때에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에 도道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향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도 있다. 대체로 길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이고 두 번째가 방도를 나타내는 길, 그리고 세 번째가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나타냈기 때문에 『국어사전』에는 ‘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길을 일컬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고 갈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따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우리말로 된 길은 규모도 그렇지만 형태 또한 다양하다. 강가나 산 속, 또는 솔숲사이에 난 오솔길, 돌담을 따라 꾸불꾸불 이어진 마을의 고샅길, 호젓한 산길,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들길, 강변에 펼쳐진 자갈길, 비 내린 황톳길의 진창길, 가로 질러가는 지름길 등 길 등 여러 형태로 길은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사람이 걸어 다니며 조성된 이러한 길들이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그 개념이 확대되고 다양화되면서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로 확대되었다. 강이나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길이 만들어지면서 뱃길이 생겨났고 철로 만든 철궤를 따라 이동하는 기차나 전철의 통로를 철길이라고 부르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항로를 하늘길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유선이 아닌 무선통신의 발달로 수많은 글들과 말들이 허공을 무한히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한 길이 다른 뜻 즉 방도(方途)로 쓰이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쓰는 말로 ‘어떤 방법이 없을까?’ 또는 ‘길이 열리다.’ 라는 말은 방도를 나타내는 말이고 그러한 길은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이 정신적인 길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길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세상은 무대로, 사람은 그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로 묘사한다. 세익스피어가 죽기 전에 ‘연극은 이미 끝났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양적 관념은 그와 다르다. 동양에서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그래서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길을 가는 나그네의 여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의 길은 하늘의 길에 따르는 것

 r_걷기추가.jpg    그와 또 다른 길이 있다. 불교나 유교, 도교 등 동양사상에서 공통적인 이념은 도(道)라고 부르는 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 또는 도덕이라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은 길로 귀추 되며 그 길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도정치(王道政治), 또는 공맹지도(孔孟之道) 등의 말이나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즉 ‘왕도(王道)는 치도(治道)’라는 말은 모두가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우리나라의 길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의주로 외엔 내놓을 만한 길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 이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사통팔달의 길이 뚫리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9세기 후반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이 개설되었었다. 산예도, 금교도, 절령도를 비롯한 22개의 도로가 역로로서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개경중심에서 한양 중심으로 도로망 구성을 재편하게 되었다. 그때 전국도로망의 기점은 창덕궁의 돈화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9개로가 있었다.
여암 신경준은 나라 정치의 기본이 치도(治道)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왕이 능, 원, 묘에 거동할 때 지나던 능행로(陵行路), 임금이 온천에 행행하던 온천로(溫泉路)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각 고을 관아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이수(里數)와 감영 및 병영에 이르는 이수의 국토의 외곽을 둘러싸는 백두산로, 압록강로, 두만강로, 팔도 연해로 등 4치로가 있었으며,  팔도의 역체로 및 파발로, 해로, 봉수로, 교련 서행로, 그리고 서울에서 의주, 경흥, 평해, 동래, 제주, 강화에 이르는 전국 6대 간선로 등이 있었다.
 

    이중환은 『복거총론』 ‘생리’ 조에서 우리나라는 지형상 수레의 사용이 불리하여 말을 많이 쓰는데, 말보다는 수레, 수레보다는 배가 더욱 효과적인 수송수단이라 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 권25 도로 ‘교량’ 조에서 ‘우리나라의 지세가 평탄하지는 않으나 수레를 사용할 수 있는 지역이 많으며, 문제는 오히려 수레에 관심 있는 자가 드물어 좁고 굴곡이 심한 길을 고치려 들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익 역시 『성호사설』에서 산이 많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중국을 본받아 길을 닦을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왜구로 인해 조운漕運하는 바닷길이 막힐 경우에 대비하여 마땅히 육로가 개설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로는 물길을 대신하고 길이 개설되면서 우리 국토는 여러 형태로 변모를 가져왔다. 충청, 강원도와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부근에는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열 개가 넘게 있으므로 한반도 남부에 최대의 산지(山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고개 중 문경새재가 632m, 죽령이 689m, 계립령이 630m, 흔히 새재인 줄 알고 넘는 이화령이 548m, 그리고 추풍령은 200m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환은 그렇기 때문에 『택리지』에서 새재와 죽령만을 큰 고개라 하고 나머지는 작은 고개라 불렀다. 물론 이것은 고개의 높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교통량이라든가 도로의 중요성까지 감안하여 붙인 명칭이겠지만 그 크기와 높이에 있어서도 그 고개들은 큰 고개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라진 역사속의 옛길

    신경준의 『산경표』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자세히 나와 있는 길, 그리고 옛 사람들의 길인 이 길들이 현대에 접어들면서 국도와 지방도로로 변화되면서 옛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 다녔던 이 길들이 속도중심의 길로 변형되고 말았다.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보자.
‘미투리는 백리 길을 가면 구멍이 뚫어지고, 짚신은 십리길만 가도 구멍이 난다. 미투리 값은 짚신 값에 비하여 열배나 비싸기 때문에 비천한 백성들은 모두 짚신을 신으면서 날마다 갈아 신기에 여념이 없다. 가죽신 값은 또 미투리에 비하여 열 곱이 된다.’
그러한 길들이 시속 100km의 자동차로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쯤 밖에 안 걸리고 시속 300km의 고속철도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시간으로 단축되었다. 물론 교통이 발달되고 세계화라고 지칭되는 이 시대에 빠른 교통량은 필요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속도와 편리라는 이름으로 놓치고 있는 것 또한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듯 속도가 중시되는 그 길들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걸어간다. 우리국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개인의 건강이나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새만금, 동계올림픽 등) 또는 한가로움과 정신수양을 위해서 국도 또한 지방도로로 표기된 길을 걸어간다.
강원도에는 역사 속의 아름다운 옛길이 많이 있다. 춘천 석파령을 비롯, 관동대로 옛길, 양양 구룡령 옛길, 한강 천삼백리 물길 외에 대륙으로 가는 동해 트레일, 7번 국도를 따라 가는 길 등은 사람들의 발길을 부르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요즘에 유행하는 ‘걷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길을 걸을까? 우리나라의 옛길을 걷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 많지 않다. 땅 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나 판문점까지 걷는 것이 주류이고,  스페인의 순례자들의 길인 ‘산티아고 길’이나 일본의 ‘에도 시대의 옛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만 눈에 뜰 뿐이다. 그 이유는 국가에서 개발만 중시하다가 보니 우리의 옛길을 방치하고 있었고, 국민들도 옛길의 중요성이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걷기를 선호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반듯하고 넓은 시멘트 길이 아니라, 좁지만 구불구불하고 비단결 같은 감촉이 느껴지는 흙길이다.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나 강화도에서 동해안까지 걷는 것도 좋지만,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우리 옛길을 걷는 것은 국토사랑의 지름길이다.
수많은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역사와 철학이 숨어 있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디에 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트레일 법’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보행로’의 폭은 얼마면 되고,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너도 나도 좋아하는 대크는 어떤 곳에 설치해야 하는가?

    그런 기준을 마련하고, 어떤 길이 가장 아름답고,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길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름다운 강길’ ‘유서 깊은 고개 길’‘고즈넉한 산 길’ ‘천천히 걸으며 명상하기 좋은 길’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와 문화의 길’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길’ 그런 길들을 발굴하여 많은 사람들을 쾌적하게 걷도록 해야 할 것이다.

 

 

r_신정일1.jpg 신정일 | 문화사학자인 신정일은 현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모임>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5년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쳐왔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2005년까지 160여회를 진행했고, 2005년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를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