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무엇인가? 세계를 이끌어 온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가 있지만, 그 씨앗은 우리네 삶의 바탕인 동네에서 시작 되었을 것이다. ‘어제’의 생활로부터 뿌리내려져 온 습관과 언어와 예의와 놀이와 관계가 ‘오늘’을 지탱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힘에 의해, 또는 자체적인 붕괴로 그 맥은 끊기고 사라져가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속도가 붙어 바로 몇 해 전의 삶터도, 이야기들도 싹둑 잘려나가기 일쑤다.   

 

‘생활문화’와 ‘문화생활’
 r_포스코.jpg    얼마 전 문광부 장관은 앞으로 ‘문화’를 시골동네까지 속속들이 보급하겠다고 했다. ‘문화’가 예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가장 빠른 영향과 감동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문화생활’하면 도시의 세련된 생활패턴을 떠 올리고 덩달아 ‘돈’이 연상되는 것은 웬 일일까? ‘문화’가 ‘돈’이라는 등식은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따지는 세태를 따르는 것이지만 왠지 개운치가 않다. ‘문화생활’을 누리는 기쁨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기 보다는 스스로의 삶터에서 찾는 것이 훨씬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50여년도 채 안 되는 세월 속에 우리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내 몰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거문화의 변화다. 60년대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초가지붕이 사라지더니, 80년대를 거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서울의 남산에서 외국인 본 가장 인상 깊은 모습도 ‘아파트’였다. 아파트 공화국의 생활은 편리성과 기능성, 익명성이 도시생활과 맞아 떨어지면서 70%를 넘는 공동주택 시대를 맞이했다. 당연히 주거문화도 변하였다. 먹을거리의 기본이던 장 담그기가 사라졌다. 그나마 김치는 김치냉장고의 출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온돌문화다. 따스한 구들장에서 생활하던 우리네 DNA는 입식생활의 썰렁함을 거부했다. 처음 아파트가 지어졌을 때 서양식의 라지에타가 설치됐으나 입주자들은 하나 둘 온돌식으로 고치기 시작해 결국은 건설업체가 온돌식으로 아파트를 공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온돌은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그렇게 살아남는 끈질긴 온돌문화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거창한 문화의 허상이 아니라 우리네 생활 속에 녹아 든 삶의 방식과 지혜가 제대로 전달되고 이어지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진정한 ‘생활문화’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단절과 소통
    역사 속의 문명과 문화는 ‘소통’ 보다는 ‘단절’의 이면을 보여준다. 흥망성쇠의 부침 속에 제아무리 찬란했던 제국의 문명도 전승은커녕 기록조차 찾기 어려운 게 세계사다. 세계를 살펴볼 것도 없이 우리 지역의 모습을 들여다보아도 금세 나타난다. 바로 한 시대 전에만 해도 있었던 중요한 사실들을 잊어버리거나 왜곡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최근 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춘천의 기락천(機洛遷-遷은 벼랑길)이 궁금해졌다. 대동여지도에는 물론 다산 정약용의 춘천기행에도 등장하는 그곳. 오금이 저릴 정도의 벼랑 위 기어가는 잔도가 상상만으로는 확연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소양호에 잠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일전에 산막골(청평2리) 배터 위 집 마당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수몰 전 동네 옛길에 대해 여쭤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잘 알지 못하므로 말문이 잘리는데, 김영수 옹(82)은 설명은 물론 직접 옛길안내를 나섰다.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양구로 가던 옛길과 일제시대 생겼던 물께(물가) 신작로를 훤히 보이는 듯 짚어 주시고, 청평사로 가던 옛길 중 남아있는 부분을 알려 주고는 문바위(기락천)를 찾아보러 나섰다. 소양댐 발전소가 있는 위편 바위산이 예전 잔도였다고 한다. 까마득한 바위벼랑으로 좁은 길이 나 있고, 그 중간 산머리에 바위로 지붕처럼 덮인 굴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단다. 절로 생긴 희한한 바위굴(옆은 틔어 있었음)이 문바위로 사람은 지나다닐 수 있는 높이였으나 말이나 소를 타고는 갈 수 없어 누구든 내려서 갔다고 한다.

    다산이 춘천을 처음 여행할 때(1820년, 59세) 들른 청평사 가는 길목의 기락천을 지나며「기락각, 두보의 ‘석궤각’에 화운함」이라는 시를 지었다. 다산 보다 1백 여 년(1696년) 전에 청평사를 다녀 간 농암 김창협은 이곳을 부복천(扶服遷)이라 적었으며, 「두 산이 협곡으로 죄어 있고 잔도가 왕왕 아주 험하다. 잔도가 다 한 뒤에 비로소 강가를 떠나 골짝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 옹은 소양댐 아래(소양댐 위편 주차장 밑) 발전소로 들어가 산머리를 살피더니 “저기, 저곳인데 없어졌네.”라며 아쉬워했다. 산을 폭파하고 깎은 곳은 흉물스런 지지대가 쳐져 있었으나 그 산길을 돌아가는 곳의 돌부리를 보며 가늠하는 문바위(기락천)는 비로소 알 만 했다. 소양댐 공사로 파괴된 그곳을 그림으로라도 고증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새삼 다산이 춘천여행을 시작할 때 동행시키려 했던 화가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 못 왔다던 일이 떠 올랐다.
끊겼던 역사와의 소통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나, 그것을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들이 가기 전에 확인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
    인터넷이 일상화 되면서 우리는 글로벌 세계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세계는 하나라는 말을 실감케 되었다. 하나의 세계, 지구촌의 이웃으로 다가서면서 차별의 벽이 없어지고 있다. ‘차별’이 없어져야 할 세계의 벽이라면, ‘차이’는 존중 되어야 할 저마다의 울타리다. 고유의 색깔이 뚜렷할수록 그 문화는 매력을 발산한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도 똑같은 일상이나 도시의 풍경들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곳’만의 독특한 삶의 향연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r_춘천아트페스티벌 1932.jpg    ‘풀뿌리 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아무리 선진화 되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뤄 물질적 풍요를 누리더라도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고 한다. 세계의 ‘행복지수’가 발표 될 때마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최하위 빈민국이라고 동정 받는 방글라데쉬 등에 사는 사람들이 1위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DNA 속에는 흙을 일구고, 맨 손으로 개척하던 시대의 땀 흘리던 야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친 일을 하며,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며 우리는 행복을 맛본다고 한다.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며,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행복한가? 라고 묻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네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확인하며, 문화의 행복을 누리고 나눌 때이다.
‘혼자 걸으면 길이고, 여럿이 걸으면 역사가 된다’는 미쁨 속에 우리 동네의 ‘오늘’을 갈무리하며 내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신용자 / 본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