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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길
느린 길 29
그저 강물은 말없이 흐르네-영월 장릉과 청령포
후텁지근하다. 한바탕 쏟아지려나. 끄느름하다. 땅을 두드리며 하늘을 진동시킬 장대비의 장엄한 연주를 고대하고 있다. 울울(鬱鬱)하고 막막(寞寞)한 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게다.
비탈을 올라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앞에 서 있다. 왕릉이라기엔 수수하고 조촐하다. 그래서 좋다. 봉분 아래를 두른 호석(護石)도 없고, 난간석도 두지 않았다. 석물(石物)이라곤 봉분 앞의 상석(床石)과 좌우에 망주석(望柱石) 1쌍, 아래쪽의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1쌍, 그리고 석마(石馬)와 석양(石羊) 1쌍이 전부다. 언덕 아래에는 제(祭)를 올리는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홍살문 바깥으로 재실, 사당과 비각 등이 있는데, 이 모두를 포함하더라도 왕릉으로서 규모는 작다.
능의 주인이 유배객인 데다가 사약(賜藥)을 받았기 때문일 테다. 역모에 관련되었으므로 함부로 시신을 수습해서는 아니 되었다. 상왕(上王)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장사를 지냈으니 바로 이곳이다.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겐 삶다운 삶이 없었을 테다. 열두 살에 왕위에 올라 열다섯 살에 선양(禪讓)이라는 이름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세 해 남짓 동안 그는 통치를 하였을까. 아무리 조숙하더라도 그 나이에 나라를 다스리기란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처지에서 소년 왕을 믿고 평안히 생업에 종사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보위에 오름은 국가와 사회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번영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한 일이겠다.
역사는 수양대군의 뜻과 역량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컸다고 말한다. ‘충의’(忠義)라는 가치관에 얽매인 중신들은 현왕(現王)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단종이 스스로 선양했다 하더라도 중신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게다. 상왕을 복위시키고자 뜻을 모으지만, 본래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입단속도 어렵고 일을 그르칠 확률도 많은 법.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한 숱한 충신들이 역사책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 한가운데에 놓일 수밖에 없던 상왕, 열일곱 살의 소년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오랫동안 그의 무덤은 세간의 이목으로부터 철저하게 묻히고 잊혀졌다. 중종 36년(1541)에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이 암장된 묘를 찾아 정비한다. 소년 왕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다시 숙종 24년(1698)에 비로소 단종으로 추봉(追封)되고, 능은 ‘장릉’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 왕으로서 대우받기까지 무려 241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단종의 문제는 섣불리 거론할 수 없었을 테다. 단종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일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겠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보위에 오르면서 조정은 수선스러웠다. 정부의 발표를 고스란히 믿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니, 그 당시야 오죽했으랴. 효종(孝宗)의 정통성 문제는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는 길고 따분한 당쟁(黨爭)으로 기록된다. 어떤 붕당에서 권력을 잡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먹고사는 일이 바쁜 백성들의 관점에서는 탁상공론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논의는, 요즈음 우리가 미처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의 문제를 계속 거론하거나 권력이 조작한 여러 사건들과 그로 말미암아 삶이 굴절되고 왜곡된 사람들의 명예와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신원해 주는 일 따위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학창시절은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상무(尙武)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그 중심엔 ‘충’(忠)이란 개념이 놓여 있었다. ‘충’이란 본래 일상에서 ‘남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을 뜻한다. 그런데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충’을 변함없는 순종 또는 복종의 개념으로 차츰 제한함으로써 의미를 왜곡, 제한하게 된다.
단종과 사육신 등은 선의 영역에서, 세조와 신숙주 등은 악의 영역에서 맞서 있었다. 이광수(李光洙)의 『단종애사』(端宗哀史, 1928~29)는 ‘민족주의’라는 묘한 시대적인 생각과 맞물려서 ‘충’이라는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다. 그 바탕을 흐르는 정서는 ‘슬픔’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계는 있지만, 김동인(金東仁)의 『대수양』(大首陽, 1931)은 세조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준 소설이었다. 지금이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균형을 갖추고 있지만, 사육신을 지표로 삼았던 학창시절엔 세조를 바라보는 시선엔 혼란이 내포되어 있었다.
장릉에서 나는 경건하지 못하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는 충의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이들보다는, 진정으로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고민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더 낫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해타산에 따라 신념이 바뀌고 배신이 횡행하는 오늘날,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들의 신념과 기개는 거울로 삼을 만하다.
능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들은 봉분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을 ‘충절’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재실의 양옆에 있는 엄흥도와 박충원의 정려각, 그리고 단종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료들은 모두 ‘충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그러한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이곳을 찾는 이들이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지는 모르겠다.
정자각은 말쑥하고 추녀가 날렵하여 언덕 아래에 있어도 짓눌려 답답하지 않다. 재실은 단아하고 정갈하여 저절로 조신하게 한다. 지난해 장릉은 다른 조선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장릉은 이제 새로운 역사의 마당을 열고 발을 내디뎌야 할 테다. 영월을 수식하고 있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글을 보면서 오늘날 ‘충절’의 대상은 무엇이어야 할까 생각해 본다.
청령포(淸泠浦, 명승 제50호)로 향한다. 서강(西江)이 뭍을 감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솔숲을 질러가면 깎아지른 벼랑이 있다. 나루터에서 보는 청령포는 물이 뭍을 품어 안고 있어 편안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는데, 둘러보면 산세가 험준하고 그 아래로 넓지 않은 강이 흘러가기에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세조 3년(1457), 단종은 이곳으로 왔다. 청령포로 내려오는 길로 짐작해 보면 옛적에는 산세가 더욱 급했을 게다. 또 솔숲 저편은 낭떠러지니 옛적엔 협곡을 방불케 하는 지형이 아니었을까. 산자락의 끝에 바짝 닿은 강은 너비가 좁아서 물살도 빨랐을 테다. 어떻게 배를 구해서 이쪽으로 건너온다 해도 깊은 산골짜기니, ‘육지 속의 고도(孤島)’라고 했다는 단종의 말은 한숨과 함께 가라앉는 절규였겠다. 영화로운 삶이 하루아침에 몰락했으니, 외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소년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었을 테다.
음력 6월이라니 한여름이다. 장마철이어서 몹시 더웠을 게다. (남)한강을 거슬러 강원도의 심산유곡으로 걸어가는 길은 울울하고 적막했으며 신산(辛酸)했을 테다. 호랑이가 출몰할 만큼 깊은 숲속엔 여름벌레소리 낭자하고 이따금 드러나는 햇발은 뜨겁게 몸을 태워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을 게다. 바람이 불면 숨은 턱턱 막히고 메마른 황토에서는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을 게다.
단종은 그때 무엇을 보았을까. 구중궁궐의 삶에 대한 미련이 청맹과니로 만들었을까. 어찌 되었든 잠시 그가 다스렸고 지금은 숙부가 다스리는 나라의 현실을 그냥 지나치진 않았을 터.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무엇을 보면서 걸었는지 남아 있는 이야기는 없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외로움과 허무함과 울적함을 안고 황톳길을 걸어 유배지로 향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으로 첫발을 디딘 곳은 태백이었다. 새하얀 눈과 새까만 탄(炭), 세상은 흑백이었다. 해발 750미터(라고 들었다)에 학교가 있었다. 4월에 눈이 내렸는데 무릎 높이였다. 봄이 왔다는 소식은 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5월에도 눈발이 날렸다. 넉 달을 머물렀다. 나는 절망하였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지가 따로 없었다. 넉 달 뒤 국방부에서 정해준 적소(謫所)로 길을 떠났다. 단종도 영월에서 넉 달을 살았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황톳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단종은 나룻배를 탔을 게다. 사공과 금부도사, 그리고 시종이 전부였을 테다. 배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1박 2일 동안 출연자들끼리 멍청한 짓을 하면서 웃고 떠들며 전국을 놀러 다니는 TV 오락프로그램이 있다. 그들의 여정엔 여기 청령포도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영향은 컸다. 나루터에서도, 강을 건너와서도 그때 아무개가 어떠했다느니 재재거리고 있다.
단종이 머물렀다는 어소(御所)엔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누군가 메가폰으로 얘길 하는 걸 보니 답사를 왔나 보다.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기록을 바탕으로 재현해 놓은 집이라 담장 밖에서 훑어만 본다.
솔숲은 예전만큼 울창한 것 같지 않다. 어소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솔숲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드나듦을 막는 글을 새긴 비석이다. 소나무는 왕실을 비롯한 각종 건축자재로 쓸모 있는 나무였다. 무엇보다도 성장이 빨라 울창한 수림을 이루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비의 갓머리는 한쪽이 떨어져 나갔고, 글씨는 풍화되어 희미하다.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라고 한자로 새겼고, 뒷면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 진흙이 퇴적하여 생기는 땅도 금지하는데 해당한다.’라는 말을 한문으로 새겼다. 숭정(崇禎) 99년이라고 연대를 새겼으니, 영조 2년(1726년)의 일이다. 금표비는 인제의 한계사(寒溪寺) 터와 치악산(雉岳山) 구룡사(九龍寺) 초입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있는데, 이들은 장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를 하였다.
청령포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349호)의 자태는 여전히 수려하다. 그 높이를 가늠하는데 비가 내린다. 비에 젖고 있는 관음송이 고혹적이다. 자비로운 보살의 자태여서 관음송인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단종은 종종 여기에 걸터앉아서 흐느끼며 울었다는데, 그 처연한 모습을 보고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관음송이란다. 어딘지 나무의 충절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하늘을 향해 곧장 뻗은 소나무를 금강송이라고 하고, 백두산 근처에서는 미인송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짐작해 본다면 단종이 유배오기 전부터 관음송이었을 테다. 전설과는 달리 자비로운 보살의 이미지로 기억해 두기로 한다. 그 당시 나이를 80년으로 셈하였다는데, 대충 헤아려보면 벌써 630여 년의 삶이다. 그럼에도 그 훤칠하고 헌걸찬 것이 뭇나무에 뒤떨어지지 않으니, 청령포는 관음송 하나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하다 하겠다.
관음송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깎아지른 벼랑이다. 단종은 여기서 한양을 바라보며 향수에 잠기곤 했다는데, 노산대(魯山臺)라 부른다. 좁은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길을 내려와 다시 오르니 낭떠러지 위에 전망대를 두었다. 조그만 돌탑이 있는데 단종이 왕비 송 씨를 생각하며 쌓았단다. 어머니의 정을 몰랐던 단종에게 아내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을 테다. 그런데 돌탑을 ‘망향탑’이라고 부르니, 탑의 이름이 단종의 사연을 충분히 갈무리하지 못한다.
단애(斷崖)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다. 산은 높은데 능선은 완만하게 흐르고, 청령포를 휘감아 도는 강물 또한 차분하게 흐른다. 산 아래 강 위엔 철로가 가로 놓여 있는데 한적한 시골길마냥 풍경에 어긋나지 않는다. 뱃길이 사라진 오늘날, 한강을 곁에 두고 서울로 향하는 철길은 또 다른 나그네길이다. 물이 맑다. 강물에 조각배 하나 띄우면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 어느덧 한 동이 술은 복사꽃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갈 테지. 문득 일렁이는 바람에 얹힌 꽃향내는 정신을 아득하게 하고, 한 줄기 피리소리에 고개를 들면 월궁항아가 미소를 지을 터. 하면서 벼랑 아래로 고개를 빼니 고만 아찔한데, 곧추선 벼랑을 보니 가슴이 서늘하다.
단종은 여기서 두 달쯤 머물렀다.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긴다. 처연한 심사는 청령포와 다름없었겠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해 10월 사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종의 사연만을 헤아리면 청령포는 슬픈 땅이다. 솔숲을, 벼랑을, 자갈밭을 연인들은 깍짓손을 하고 거닐며 사진을 찍는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많다. 행복이 넘친다. 모두모두 명랑하고 즐겁다. 관음송은 빙그레 웃으며 이들을 보고 이 행복한 웃음을 듣고 있겠지. 배가 건너오고 있다. 자갈밭에 서서 망연히 강물을 보고 있다. 해맑은 아이와 아빠일까, 물수제비를 띄우고 있다. 빗방울은 떨어지는 듯 마는 듯. 세상사야 본시 무상(無常)한 것. 그저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흐를 뿐이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단종을 모셔 두고 돌아서면서 읊었다는 시조가 생각난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처럼 울면서 밤길 가는구나.
글/사진 김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