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이다. 아직도 응달에는 희뜩하게 눈의 잔해가 남았지만, 어쩔 수 없이 봄이다. 소설‘말무리 반도’의 배경이 되었던 강원도 고성을 찾자하니 진부령의 나무들은 일제히 푸름과 생명을 퍼 올리고 있었다. 경계도 없는 꽃과 나무들이‘세계 유일의 분단도’라는 강원도 북방의철조망을넘나들고있다.
댓재, 백봉령, 대관령, 미시령, 진부령은 오래 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주요 고갯길이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진부령은 미시령보다는 원만하다지만, 강원도 고갯길이 그러하듯이 굽이굽이 커브길이 곳곳에서 휘돌아 친다. 썩어도 준치요, 이래봬도 백두대간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겨울의 결기가 녹지 않은 것인지 만만찮은 산 둘레가 완강하다.
강원 고성군 오대면(五臺面) 냉천리(冷川里) 금강산…지금은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주소가 바뀌어 있다. 건봉사 일주문 앞까지 잘 정비된 길은 보통의 절 입구가 보여주는 풍광처럼 잘생긴 소나무들과 호젓한 산길로 푸근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느낌을주었다.
신라 때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도선, 나옹 선사가 중수했다는 건봉사는 지금 한창 중창불사 중이었다. 6.25때 전소돼 옛날의 위용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때 설악산 신흥사와 양양의 낙산사, 백담사를 말사로 거닐 정도의 대찰이었던 건봉사는 석가의 진신치 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과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글씨가 새겨진불이문이볼만하다.
주인공이 며칠간 머물렀고, 또 작가 박상우가 실제로 몇 달을 지냈다는 빨간 지붕의 별장은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이곳이 접적지역이라는 것을 상징하듯이 곳곳의 군부대 막사와 훈련장에서 빛을 내는 철조망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펼쳐지는 자연과는 사뭇 이질감을 주어 마음이 무거웠다.
소설 속 삼십대 주인공이 겪는 혼란과 갈증은 현재라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생 증후군 같은 게 아닐까? 종종 도심 속의 삶은 건조하고 무미한 일상으로 채워지기 쉽다. 여름 날 찜통 같은 도시에서 교통이 정체된 차속이나, 후텁지근한 빌딩 속에 앉아 있어보
면 알리라. 단지, 산들과 나무를 배경으로 한 바람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자체로 건강복권에 당첨되고도남음이 있으리라는것을….
“자기 삶의 윤곽선을잃어버린
현대인의무의적이고자멸적인일상!
소설‘말무리반도’속에
녹아든강원의풍광을이야기한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다윗말, 첩첩이 쌓인 산들로 인해 여기에서만 보면 이곳이 바다와 인접하고 있다는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갑작스레 급한 마음에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것처럼 바다를 찾아 나서 본다. 이정표를 따라 간성읍에서 거진 쪽으로 나가자 거짓말처럼 오른쪽에‘툭’하고 바다가나타났다.
바다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또, 적멸이란 얼마나 가슴 벅찬 공허를 의미하는 것이랴. 빛이 만들어 내는 무한한 시각의 변화, 빛을 향한, 빛에 의한, 빛의 욕망인 바다. 무수한 빛의 입자가 파종되어 각양각색으로 명멸하는 바다…. 그러나 그 바다는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 긴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지금은 많이 철거중이라 하지만, 아직도 삼엄한 해안 풍경을 배경으로 대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켠 군용 트럭들이긴 열을 지어 달리고있다.
소설 속에서 삶의 좌표를 잃은 주인공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주요 모티브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모든 산은 바다로 뻗어 나가고 싶어 한다’는 소설 속 여자의 말처럼 구선봉을 필두로 쏟아질듯 바다로 달려가는형상을 한 말무리반도를 보고 난 후가 아니었을까싶다.
지금까지 자연은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성장제일주의의 다른 말은 자연파괴라는 말과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 속에서 리필 되고 위무 받는 종속적 존재들이다. 일상의 남루에 찌든 주인공이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말무리 반도를 보고, 다시금 새로운 힘을 재충전하듯이.
약간의 안보교육을 받고 올라선 통일전망대에는 중학생들의 수학여행 행렬로 복작거렸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맑은 날씨는 매우 드물다는 안내원의 말처럼 마침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다본 북쪽해금강은 짙은 안개로 싸여 있었다‘. 말무리반도’같은 상서로운 바위는 그리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인지 그저 우리의 복잡한 근현대사처럼 어렴풋한 풍광으로 있을 뿐이었다.
길은 통하고 이어져야 한다. 지금은 비록 철책으로 멈춰선 길이지만, 부산에서 시작해 함북 온성까지 뻗은 1천 3백리, 7번국도의 길은 종내에는 이어져야 한다. 그렇게 꽃은 남에서 북으로 치솟아 올라갔고, 새도 또한 가벼운 날개짓으로 그 완강한 경계를 지우고 있으니 어쨌든 봄은다시 오고 있는 것이다.
|줄거리|
소설은 생계의 무거운 짐으로 10여 년간 "꿈을 위하여 꿈을 잠재우는 과정"으로 허비한 미술을 전공한 삼십 중반의 이혼한 남자와, 북강원도에 아들까지 두고 온 실향민 아버지를 둔 한적한 시골에서 제한적 삶의 반경을 살던 이십 중반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해원(海原)을 향해 아우성치듯 달려 나가고 싶은 속 깊은 산의 울음소리" 같은 갈증과 혼돈으로 삶의 좌표를 잃은 남자와 "밖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치고 싶어 하던" 여자가 만나‘말무리 반도’의 존재와 의미를 이야기 하면서 "이 아침, 또 다른 나의 하루가 그녀에 대한 강렬한 존재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야반도주를 결행키로 한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면서 "사물의 윤곽선뿐 아니라 현실과 환상의 경계까지 고스란히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 그녀와 만나기로 한 그 지점이 바로 환상의 핵을 이루는 공간인 것 같다는 자각이 아뜩하게 뇌리를 스쳐 간다. 그녀가 아니라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본래의 나를 만나야 하는 장소(원점), 거기가 여기가 아닐까? - 하며 여자를 놓아둔 채 조심스럽게 바다 윗말을 떠나 버린다.
|작가소개|
작가 박상우는 경기도 광주 생으로 춘천고를 거쳐 중앙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8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중편 <스러지지 않는 빛> 당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창작집〈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와 장편소설〈호텔 캘리포니아〉〈, 내 영혼은길 위에 있다〉〈, 까마귀 떼 그림자〉등이 있다.
수상경력으로는 1988년〈스러지지 않는 빛〉으로《문예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1999년〈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말무리반도>는 제 22회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작이다.
최삼경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