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2015.02.11 10:08

문화통신 조회 수: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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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속의 생 그 자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일부

 

박노해(기평)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어찌어찌하여 그와 인연이 닿아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평화포럼엘 주말마다 드나들었다. ‘평화포럼은 그가 무기수로 독방에 갇혀 있다가 형집행정지로 세상에 나와 꾸린 단체였다. 거긴 고분고분하게 사는 걸 마뜩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 모였었다. 어느 날 기평이 형(그와 나는 형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20억이 생겼다면서 땅을 한 100만평 구입해서 수도원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참치회사의 사장님이 좋은 일에 쓰라면서 낸 돈이라고 했다. 기평이 형은 일주일에 한 번씩 춘천으로 내려와 홍천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이 될 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 년 쯤 했지만 결국 좋은 장소를 찾지 못해서 수도원 짓는 일은 포기하게 되었다. 만약 그때 수도원이 만들어졌더라면 나는 지금쯤 수도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수도원 짓는 일이 무산되자 그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속내의를 보내기 위해 그 돈을 모두 썼다.

 

그해 겨울, 화천 오탄리에서 평화포럼 일행들과 삼겹살 파티가 열렸다. 어둔 밤 깊은 골짜기 농가의 마당은 엄청 추웠다. 그래도 마당에선 그냥그냥 추위를 참을 만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용치 않던 농가의 방은 한데나 다름이 없었다. 골짜기에서 내리치는 바람에 문풍지가 부~웅 부~웅 울 때 기평이 형은 장터의 거지들을, 소금 창고 옆 문둥이가 얼어 죽을까, 뒷산의 노루나 토끼가 굶어 죽지 않을까걱정하던 할머니 이야길 했다. 형은 그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고 했다.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그다지 춥지 않았는데 우리 집은 추웠다. 입춘이 지난 지금도 춥다. 집지은지 15년이 지났기 때문에 방바닥 난방이 망가졌고, 꼭꼭 들어맞지 않는 오래된 창문으로 훤하게 하늘이 보이는 까닭이다. 문풍지라도 붙이라고 교우들이 성화를 대지만 내 딴에는 깊은 궁리가 있어서 그러지 않는다.

 

요즘 아파트나 개인 주택이나 할 것 없이 개미새끼 한 마리 기어 들어올 틈이 없는 초현대식, 최과학적 창틀과 창문을 달아 방안의 따뜻한 공기가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바깥의 찬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사실 문()이라는 그 자체는 합리적인 계산이나 논리로 측량할 수 없는 존재다. 문을 마음에 비유한 시조들을 알지 않는가? “내고자 창을 내고자 이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로 이어지는 시조는 마음에 창, 틈을 내어 열자는 게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한숨아 세한숨아 네 어느 틈으로 들어온다.”는 싯귀는 마음의 창문을 닫아 한숨의 바람을 막자는 것이다. 문이란 이렇듯 여는 것과 닫는 것의 상반되는 기능을 한 돌쩌귀에 고정시킴으로, 닫는 것이기도 하고 여는 것이기도 한 중용의 지대적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겨울 바람이 매섭다 한 들 창문을 그토록 매몰차게 걸어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방안이 춥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겨울바람이 무섭다면 그저 틈 난 문 사이에 문풍지를 붙이면 그만이어야 한다.

 

서양치들은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본다는 말이 있다. 문을 닫으면 바깥사람이 안을 볼 수 없고, 안 사람이 밖으로 자신을 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 치의 틈도 없이 문이 꼭 들어맞았기 때문에 생긴 습속이요 말일 텐데, 소위 프라이버시 [privacy]의 극치를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네 문은 아무리 닫아도 틈이 생겼다. 그래서 문틈으로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래서 생긴 게 문풍진데, 가까운 일본도 우리처럼 창호지를 바른 문이지만 서양처럼 꼭꼭 들어맞아서 문풍지를 바르지 않는다. 문풍지, 틈은, 그 새를 드나드는 시선과 바람은 우리만의 특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풍지 소리를 들으며 장터의 거지들을 걱정하는 휴머니티가 발동하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서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문풍지 문화는 무엇이든지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자()의 문화와 양극을 이루었다. 그야 어디 문풍지뿐일까. 문풍지의 이웃 사촌격인 돌쩌귀도 서양의 경첩과는 달리 망치로 두드리거나 손으로 벌려서 얼마든지 그 틈을 벌리고 좁힐 수 있는 융통의 기물(奇物)이 아니던가!

 

문풍지와 돌쩌귀가 우리네 거주공간과 활동공간의 중간에 자리 잡은 까닭은 섬세하고 정밀하지 못한 기술 탓이 아니다. 용자창, 거북창, 완자창 같은 기밀한 창문 살을 짜는 백성이 왜 그까짓 문짝하나 꼭꼭 들어맞게 짜지 못했을까. 뭐 하러 문틈을 내고 임시방편처럼 문풍지를 붙일 궁리를 했을까?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깊은 존재의 심연을 사모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자로는 잴 수 없는 문의 상처, 빛과 어둠, 바람과 사색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치 두치의 꼼꼼한 계산으로 삶이 되지 않는다는 생의 심연,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를 깎는 정밀한 대패소리보다 밤의 문풍지 소리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겨울동안 온갖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여태, 덜컹거리는 창문과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까닭은 이것이다.

 

() 내고쟈 창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들장지 열장지 고무장지 세 살장지,

암돌쩌귀 수돌쩌귀, 쌍배목 외걸쇠를,

크나큰 장도리로 뚝딱뚝딱 박아 이내 가슴 창 내고자

임 그려 하 답답할 제면 여닫어나 볼까 하노라.

<창 내고자/고시조/작자 미상>

 

허태수 춘천성암교회 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며 <자기포기>, <영혼의 약국>, <사람이 중심이지요>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