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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통신 조회 수 173 추천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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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시청률 40%를 넘었단다. 극 속의 두 남녀 주인공의 연기력이라든지, 군인과 의사라는 설정 때문이라는 평들이 쏟아진다. 그렇겠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내면을 더 깊이 후벼 보자면 ‘칼’과 ‘바늘’이라는 이 2항 대립의 문화적 DNA가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칼은 남자의 전유물이다. 남자들은 그 칼로 전쟁을 한다. 찌르고, 자르고, 죽이고, 베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지배하는 힘이다. 그 표상이 군인이다. 반대로 바늘은 깁고, 잇고, 꿰매고, 덮고, 살린다.
그 선혈이 낭자한 전쟁의 상처와 아픔, 죽음과 고통, 상실과 훼손을 보듬는 게 바늘이다. 여자들만의 무기가 바늘인데, 이걸로 남자들이 난자(亂刺)한 생명을 잇고 평화를 도모한다. 그 바늘의 현대적 표상이 의사다. 이게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원인이다.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가 있다. 여기서 작가는 팍팍한 세상을 이길 힘이 여성성과 바느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작가에 의하면 바느질은 ‘기도’이며, ‘복을 짓고 받는 행위’이며, ‘자기완성’이며, ‘내면의 수양’을 이루는 길이라고 했다. 칼로 성장한 근대산업사회의 지배적이고 침략적인 전쟁문화를 생명과 평등의 의식이라고 했다.
바느질은 산업사회에 의해 붕괴된 ‘여성’과 ‘여성문화’에 대한 회상이고 여성성의 미래에 대한 인류학적 희망이기도 하다. 산업사회는 전쟁의 사회였다. 전쟁은 ‘여성’ 혹은 ‘여성성’을 먹이로 삼는다. 이렇게 우리가 남자들, 칼로 전쟁을 해서 근현대의 문명을 일구고 사는 동안 깁는 문화와 빠는 문화는 공장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더 이상 ‘여성’이 문명의식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유니섹스, 이코노믹 섹스로 바뀐 것이다.

 

인간은 같은 강철로 두 개의 다른 도구를 만들었다. 하나는 칼이고 다른 하나가 바늘이다. 이 두 개의 도구는 마치 낮과 밤처럼 2항 대립의 문화를 상징한다. 칼은 주로 남성들의 전유물로, 피와 승리와 지배와 자르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바늘의 길은 갈라지는 것, 떨어져 나가는 것, 그 마멸과 단절을 막아내는 결합을 향해 있다. 과거의 남자들이 칼을 찼을 때 용감해 보였다면 여자들은 반짇고리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웠다. 그게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냐고, 또다시 여성들을 남성들의 점유물로 내몰려는 꿍꿍이 아니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옛날 아내들이 등잔불 밑에서 긴 밤을 견뎌냈던 것은 바늘이 아니잖은가! 아이를 낳고 기르며 끝없이 갈라지는, 떨어져 나가는, 그 마멸과 단절을 막아내는 결합의 힘과 의지 아니었던가?

 

바느질은 칼질과 다르다. 두 동강이가 난 것을 하나로 합치는 작업이다. 그래서 바늘의 언어는 융합과 재생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싸우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바늘을 들고 그 터진 옷깃이나 옷고름을 기워준다. 아니다. 그런 싸움이 아니다. 인간은 가만히 얌전하게 있다 해도 옷을 해지게 만든다. 어머니는 바로 이 시간의 마멸과 싸우기 위해서 칼보다 더 예리한 그 바늘 끝을 세우는 것이다. 칼끝에는 절대다수의 절망이 피로 물들고 극소수의 희열이 꽃으로 피지만, 바늘 끝에서는 피가 흐르는 게 아니라 사랑과 정이 흘러내린다. 어디 그뿐이랴! 그대들의 늙은 어머니가 바늘귀에 실을 꿰는 장면을 목도한 적 있는가? 가는 바늘귀에 실을 꿰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 그리고 그 아내의 표정은 꼼짝 않는 수도사(修道寺)의 경건이 아니던가!

 

더 이상 바느질을 하지 않고, 옷을 기워 입지 않는 다는 말은 폭력에 의해서, 시간에 의해 찢기고 헐고 낡아지는 것에 대해 그 저항의 힘, 재생의 꿈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재생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고통스러운 것이지 결코 일자리, 밥숟갈, 밥그릇 때문만은 아니다. 해진 옷을 기워 가면서 물질의 존귀함과, 마멸해가는 시간에 저항하는 삶과 의지를 배웠었다. 결핍이라는것, 그리고 가난이라는 것, 해어진 옷을 깁고 더러운 빨래를 빨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생각했었다.


순수한 것들에게, 때를 묻히는 모든 폭력에 대해서, 그리고 온갖 사악한 자의 검은 손에 대해서, 그렇게 싸워가는 정화(淨化)의 노동이 바느질이고, 어머니고, 여성이었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문화가, 여성 문화가 칼의 침탈로 지배당한 것이다.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도망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허수아비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옷에 묻어 있는 사람 냄새 때문이라고 한다. 참새만 사람 냄새를 아는 게 아니다. 요즘 사람들도 ‘사람 냄새’ 나는 음식을 찾아다닌다. ‘사람 남새’가 나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옷에서 나는 사람 냄새, 음식에서 나는 사람 냄새가 뭔가. 어머니 냄새, 여성의 냄새가 아닌가! 그 유형의 냄새를 짓는 도구가 바늘이고, 그 숭엄한 행위가 바느질이다. 그러니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칼의 배반성을 성찰하고 바늘의 생명성을 희구하는 현대인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자유로와진 여성들을 다시 부엌으로 감금하고 바느질의 가사노동에 묶어두려는 음모가 아니다. 그 노동들이 상징해 주고 있었던 정신의 영역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보여주고 있다는 걸 증빙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바늘과 바느질의 예술을 찾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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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수 춘천성암교회 담임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성찰적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자기포기》, 《영혼의 약국》,《사람이 중심이지요》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