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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4 11:30

붓글씨와 벽돌글씨

문화통신 조회 수 306 추천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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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나는 컴퓨터로 글자를 찍어낸다.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한글의 초성과 모음을 익힐 때 빼고는 글씨를 쓰지 않는다. 그저 벽돌공장에서 같은 크기와 색깔의 벽돌을 찍듯 그렇게 글씨를 찍어낼 뿐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붓이나 펜의 문화가 아니다. ‘벽돌문화’다. 같은 규격, 같은 색채, 같은 형태를 요구하는 벽돌문화, 천 개 만 개가 있어도 결국은 하나의 돌로 요약되는 벽돌문화, 벽돌을 쌓는데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치수가 다르거나 형태가 다른 벽돌이 섞이게 되면 그 전체의 질서가파괴되고 만다. 이 문명의 벽돌로 문자 세계, 의식 세계 안에 우리가 산다는 뜻은 곧 ‘세계의 환자’로 산다는 것이다.

 

하늘이 만든 것에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굽이쳐 흐르는 강의 곡선이 그렇고 솟구친 산봉우리와 능선이 그렇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벽돌을 쌓아 놓은 벽 같은 산봉우리와 능선을 보게 된다면 금새 정신병이 도질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하늘의 구름, 산, 바람, 물 흐르는 소리, 바다를 보며 해소되는 까닭은 그것들이 공장에서 찍혀 나온 벽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 번 수만 번 쳐다봐도 하늘의 구름은 같지 않다. 길가에 널부러진 돌 하나하나를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그 많은 돌이 있어도 하나같이 그 형태와 빛깔이 다르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같은 거라곤 그 무엇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세계 혹은 문명은 그 반대다. 음식, 옷, 집, 차, 머리모양, 구두, 가방과 심지어는 생각, 꿈, 인간으로서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조차 공장에서 찍어낸 벽돌을 닮았다. 자연의 돌과는 정반대로 규격에 맞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세계에서 ‘규격외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만 ‘불량품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펜이 칼보다 강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모두 제 손으로, 제 마음대로의 글씨체로 사고하고 행동하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펜이 칼보다강한 게 아니라 글자를 벽돌처럼 찍어대는 자판기의 힘이 모든 걸 소멸시키는 ‘무서운 불’이 된 세상이다. 옛날 사람들은 글자를 찍지 않았다. 보드라운 붓으로 글씨를 쓰고 펜으로 마음을 새겼다. 모필 끝에서와 펜의 그 갈라진 틈새에서 베어 나오는 묵향과 잉크 냄새와 함께 하나씩 태어 나오는 글씨들은 작은 풀잎, 작은 돌, 옅은 바람과도 같았다. 잘 쓴 글씨든 못 쓴 글씨든 붓과 펜으로 씌어진 글씨에는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붓글씨를 보고 누구나 ‘기품이 서렸느니’, ‘기백이 있느니’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글씨를 쓰는 사람의 지문이나 진배없다. 붓글씨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붓은 끝이 부드럽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영혼을, 의지를 그리고 그 생명적인 리듬까지 글씨의 한 획마다 옮겨놓을 수가 있다. 한일자 하나라를 보더라도 그냥 가로 지은 선이 아니다. 붓을 대고, 끌고, 뗀 삼박자의 숨결이 있다. 그래서 서예를 감상할 때 기본이 ‘대고, 끌고, 떼’는 삼박자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김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을 읽다가 나도 내 물건이랄 걸 하나 가져봐야겠다 싶은 마음이들었다. 수 십 년 책 읽기에 몰두하며 살았으니 책이 내 물건이랄 수도 있겠으나 독서는 이미 보편적인 일이 되어버려서 고유한 나를 대신하신 못한다. 여러 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그동안 쓴 잉크병을 내 물건, ‘남자의 물건’으로 삼았다. 중학교 시절 이후로는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이 사라졌지만 난 그동안 꾸준히 만년필을 써 왔다. 만년필도 요즘은 일회용 잉크 카트리지가 달려 나오지만 난 잉크를 빨아 담아놓고 쓰는 컨버터만년필을 즐긴다. 그러다 보니 각종 잉크와 잉크병에까지 마음을 나누고 살았으니 과연 ‘나 다운’선택이었다 싶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글과 여타의 문장들을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려서 찍어내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벽돌장과 같은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진 게 붓이거나 만년필이 아니라 컴퓨터 자판기인 까닭이다. 붓글씨나 펜글씨와 가장 대극적인 글씨는 벽돌처럼 찍혀 나오는 글씨, 기하학적인 직선과 일정한 규격을 갖춘 그 인쇄 활자이다. 내 컴퓨터에 저장된 글씨체를 확인해 보니 218개의 글씨체 즉 규격이 들어 있다. 우리가 붓을 놓고 펜을 집어 던지고 얻은 이 ‘벽돌글씨’는 각양 사람의 손과 얼굴의 지문을 뭉개 버렸다. 더 이상 거기에는 ‘쓴다’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내가 긁어대는 이 문장들 속에 나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내가 이 원고를 기한이 며칠 지나도록 긁어대지 못한 연유도, 나 없는 나의 문장을 꾸며내야 하는 마지못함이 발목잡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빨간 울타리 진 원고지에 내가 평소에 쓰던 ‘내 물건’으로 글의 ‘씨’를 뿌리라고 했다면 이보다 더 잘, 빨리 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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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가 찍는 행위로 바뀌는 데서 활자문명은 시작되었다. ‘석도화론’이라는 게 있지만, 나는 사실 서도를 모른다. 내가 연필 세대에 태어나고 자란 탓이다. 그러나 차츰 그 쓴다는 행위가 한 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쏟아붓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쓰는 일’은 그저 손끝으로 끄적거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쏟아붓는 것이다. 온몸으로 글씨를 쓰는 그 자리에서만, 영혼은 하나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다.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으로 움직여지고 손가락은 손목으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고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추사는 그의 서론(書論)에서 말했다. 그러니까 추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붓을 잡고 글씨를 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붓에서 펜으로, 펜에서 연필로, 연필에서 볼펜으로, 볼펜에서 컴퓨터 자판기와 복사로 진화했다. 추사의 공간이 메워진 것이다. 글씨는 단지 의미만을 쌓아가는 벽돌장이 된 것이다.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공간의 생명의 달무리 같은 것, 인격의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종말을 맞은 것이다. 벽돌문화는 익명의 사회성을 갖는다. 이런 사회 속에서 개성은 ‘별난’ 존재에 대한 방외적 언어가 된다. ‘글씨’를 쓰며 자아가 돌아오는 시간을 누리던 혼들이 그 시간을 그냥 죽여버린 것이다. 활자 글씨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지금 이 활자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다. 내 자신의 독자적인 생과 그 존재의 또 다른 의미를 각인시킬 방법이 이 도구들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자신이 이 우주의 유일자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작 하나를 패도 그 도끼소리에 자신의 영혼을담은 음악소리를 낸다는데, 나는 어느 천년이 되어야 생명의 달무리 같은, 인격의 아지랑이 같은 ‘글의 씨’ 하나 이 우주에 심을까! 그리고 이 고백을 자판기로 찍어내야 하는 부조화라니!

 

 

 

허 태 수
춘천 성암교회 담임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성찰적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포기>, <영혼의 약국>, <사람이 중심이지요>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