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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통신 조회 수 31 추천 수 0

 

엘리베이터01.jpg나는 예배당 옆에 목사관에 살고 있고 어머니는 시내의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신다. 장남인데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문제는 오늘 아침에 발생했다. 모처럼 어머니를 뵈려고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는데 멀찍이 승강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같이 가요!” 소리부터 지르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닫히려는 문을 비집고 들어서니 젊은 주부가 혼자 타고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참 그 짧은 시간이 어두워진다. ‘고맙다’고는 말했지만 눈길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멍하니 서 있는데 자꾸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치다. 그래도 나는 딴청만 부렸다. 내 행동이 예의 밖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쯤엔가 엘리베이터가 섰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휙 돌아서더니 소리를 지른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순간 ‘이 여자야 말로 왜 이러지?’생각했다. 아뿔싸! 거긴 어머니가 사시는 6층이 아니라 12층이었다.


대체로 엘리베이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런 거다. 헐레벌떡 달려야 하고, 쫓기지도 않는데 다급하게 문을 밀치고 나서야 하고, 제 눈을 잠시 없는 것으로 의식에서 제거해야 하는 불편과 어둠과 도주의 공간이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나는 경주를 하는 거다. 바쁜 일이 꼭 있어서가 아니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내려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데도 말이다.


본래 인간은 위로 오르고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이라는 걸 만들었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층계는 정신이나 행동의 한 과정을 보여준다. 아무리 바빠도 계단은 비약이나 생략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열 개의 계단은 열 개의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는 열 개의 시련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고뇌와 시련을 자발적으로 극복한 연후에라야 오르고 내려갈 수 있다. 고뇌의 그 한 층 한 층은 하늘로 향하는 문과도 같고, 내려가는 그 한 층 한 층은 열반의 문고리와도 같다. 그래서 계단은 탑과 구별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02.jpg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라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가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인간은 계단의 영웅적 승격을 파괴하고 기능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발명한 것이 엘리베이터다.” 기능주의에 오염된 장사치들이 만들어낸 무저갱(無底坑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게 되면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밑 닿는 데가 없는 구렁텅이)이 바로 엘리베이터인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고뇌와 고통을 거세한 욕망의 급속충전기이다. 한 층 한 층 고뇌의 계단을 생략하고 고통을 피해 손쉽게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오염된 계략이다. 그 오염된 현실의 ‘엘리베이터의 자화상’이 바로 최순실 사태다. 기실, 엘리베이터를 발명한 유럽 사람들은 우리보다 덜 성급하다.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세계 여러 나라 엘리베이터의 ‘열림’과 ‘닫힘’의 단추 중에 유독 한국의 그 단추만 반질반질하다고 한다. 더 빠르고 더 성급하게 오르고 내리고 했기 때문이다. 급할 때가 아니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열림’과 ‘닫힘’의 단추를 사용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그 시간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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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장사였던 신라의 진평왕이 어느 날 내제석궁(內帝釋宮)으로 향하게 되었다. 돌층계를 밟으니 둘셋이 한꺼번에 깨졌다. 왕의 신하들이 깨진 돌들을 치우려고 하자 돌을 치우지 말라고 명했다. 뒤에 오는 자들로 하여금 그걸 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인생은 계단이 깨지도록 한 층씩 한 층씩 밟고 올라서고 내려서야 하는 것이지 한꺼번에 둘 셋을 디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예들은 어쩌자고 깨진 돌들을 치우고 저토록 엘리베이터의 횡행을 일삼는가! 별로 바쁜 일도 없는 작자들이 야구선수처럼 내달리질 않나, 별반 중요한 위치에 있지도 않은 푼수들이 임금님 행차를 일삼으니 ‘이 꼴’ 아닌가!


속도를 나타내는 ‘스피드’라는 말은 본래 부와 성공을 나타내는 말이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속도의 철학은 서양이 본거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는 속담이 있는 거로 보아 우리네가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쉬어간들 어떠리’ 하며 벽계수의 말고삐를 잡는 황진이의 손길과 파란 달빛에 사는 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했다. 일본 사람은 종종걸음을 걷는데 한국 사람은 대로 한복판을 유유히 걷는다던 그 기품을 우리는 인간다움이라고 했다. 


그녀와 내가 다른 인간인 것은, 그녀는 인생에서 성능 좋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살았다는 것이고 나는 엘리베이터 공포증 때문에 계단밖에 이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허 태 수
춘천 성암교회 담임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성찰적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포기>, <영혼의 약국>, <사람이 중심이지요>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