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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통신 조회 수 71 추천 수 0

공감미감2.jpg본시 인간이란 네 발로 달리는 짐승처럼 강하지 않고 날개가 있는 새처럼 빠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소리 없이 달려드는 뱀이나 독충류의 독을 막을 만한 그 무엇도 없다. 대신 인간은 뇌를 키워 궁리하고 생각하여 행동하는 진화를 거듭했다. 맹수를 피하고 사충(蛇蟲)의 독을 멀리하는 지혜를 발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나무를 휘고 얽어 만든 [집]이었다.
[집]이란 위 칸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 칸은 돼지를 잡아다 기르는 것이었다. 돼지란 어떤 독충도 다 잡아먹을 수 있는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집을 뜻하는 ‘가(家)’ 자는 집을 형상한 ‘면(宀)’ 자와 돼지를 형상한 ‘시(豕)’ 자를 합해 쓴다. 대개 이러한 문화는 일찍이 다른 나라에는 없던 문화였다


고구려 풍속에 부경(桴京)이라는 작은 창고가 집집이 있었는데 부경이 바로 그러한 문화유산이었다. 아래 칸에는 돼지를 기르고 위 칸에는 찬거리나 곡식을 넣어 두었던 곳이 부경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제주도 같은 곳에서는 측간(廁間) 아래에다 돼지를 길렀는데, 부경의 유속(遺俗)으로 이른바 ‘똥 돼지’가 그것이다. 제주도 여행객들이 꼭 맛보아야 할 음식이라고도 한다.

 

모든 소리에 성감대를 가진
양철지붕을 올려야겠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너도밤나무 나무란 나무들
갈잎과 솔가리에 얹히는 된서리와 별빛 달빛마저
여줄가리 소리들로 쟁쟁하게 되비추는
거울을 눌러 입힌 양철지붕을 그믐밤 고양이가 거닐 때
그 발자국에서
꽃들이 눌러 퍼지는 소리에 소스라치는 고양이여
겨울에도 한뎃잠을 자다 깬 꽃들이
양철지붕 꿈속의 비명을 던져 올려도 좋겠네
- 유종인,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중에서


며칠 전, 고성에서 설교하며 먹고사는 후배가 집을 새로 지었대서 다녀왔다. 예배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주택의 경우에도 집을 지을 때 건축주가 정하는 원칙은 실용성과 편리성 그리고 신속성이다. 거기에 돈을 덜 들이고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해변 작은 동네에 위치한 후배의 예배당도 이런 건축 원칙을 적용한 탓에 네모난 상자에 창문을 여기저기 붙이고, 실용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돌출물을 붙였다. 이렇게 집은 무의미성이나 추상성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집 짓는 재료들과 거세된 문화적 유산의 홀대에 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우주에 점 하나를 찍는 일
우리가 천자문을 배울 때 ‘우주(宇宙)’라는 두 글자를 읽는다. 둘 다 ‘집’이다. 그러나 앞의 집 ‘우(宇)’는 [처마]를 말하고 뒤의 집 ‘주(宙)’는 [들보]를 말하는 것으로 모름지기 집은 ‘처마를 내고 들보를 거는’ 것을 의미했다. 그게 집이고, 집을 짓는다는 건 곧 우주와의 연계를 의미했다. 그래서 우주(宇宙)다. 이런 문화적 유산성에 비춰볼 때 오늘날의 건축물을 집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래서 아마도 집이라 하지 않고 그냥 ‘건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유종인의 <양철지붕을 사야겠다>라는 시를 한 번 보시라. ‘모든 소리에 성감대를 가진 양철지붕’, ‘된서리와 별빛 달빛마저 쟁쟁하게 되비추는 양철지붕’, ‘겨울에도 한뎃잠을 자다 깬 꽃들이 꿈속의 비명을 던져 올리는 양철지붕’은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존재한다. 집과 삶과 문화와 감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인간, 자연, 우주,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융합체가 집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미를 말할 때 가장 처음 꼽는 게 뭔가? 서울 시청사의 현대적인 건축물인가? 아니다. 순차적으로 접근해 보자.

 

공감미감.jpg한국의 미는 선(線)에 있고 중국의 미는 형(形), 일본의 아름다움은 색(色)이다. 한국의 선(線)을 말할 때 예외 없이 인용되는 게 바로 ‘용마루’나 ‘처마끝’의 선(線)이다. 처마 끝 선은 방바닥으로부터 58도로 되어 있다.
다 같은 기와지붕이지만 한국의 처마는 직선적인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그것도 그냥 곡선이 아니다. 그 끝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치켜져 올라가 있지 않은가! 우리의 집 처마 선을 방바닥으로부터 58도로 치켜 올린 것은 그야말로 반작용의 기하학이다. 대체로 기와지붕의 위용은 엄청나다. 수백 톤의 무게가 억누르는 듯하다. 그런데 아무도 엄청난 무게의 억누름에 답답해 하거나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바로 처마의 선 때문이다. 58도의 미학이다. 땅을 억누르는 육중한 무게가 갑자기 부력을 얻어 허공으로 떠오르려는 것이다. 땅을 향해 하강하던 제비가 지면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방향을 돌려 하늘로 치솟아 올라갈 때 우리는 거기서 안도감을 느낀다. 58도 휘어짐이 이런 이치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과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힘의 교차점, 우주의 중력과 인간의 욕망이 만나는 점, 거기에서 처마 끝 곡선 58도의 신비가 생성된다. 의식의 표층을 뚫고 올라오는 인간 무의식의 욕망을 억압하고 반작용의 운동성으로 살짝 들어 올려진 처마 선, 58도의 철학이다.
욕망이 무한인 요즘 세상과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이 지어내는 건물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욕망을 제압하는, 우주의 중력을 무마하는 58도의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글 _ 허태수, 사진 _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