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미감.jpg

 

전등불을 켜지 않아도 새벽 5시는 환하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오른쪽으로 난 창을 젖히고 예배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동안 그렇게 새벽 기운을 쬐다보면 새벽 기도를 마친 교우들이 예배당 문밖으로 나온다. ‘오늘은 누가 오셨나’……늘 같은 얼굴들이지만 새벽처럼 상쾌한 마음으로 본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다. 콩팥이 변변치 못해서 그렇다. 그러니 새벽에 일어나 창밖으로 교우들의 발걸음을 잴 뿐이다 .


새벽에 왔던 교우들이 돌아가면 나는 화장(?)을 한다. 언젠가 산길을 걷는데 어떤 자매가 대열의 뒤로 처지면서 “화장 좀 고치고 갈게요.” 할 때 알았다. ‘그’게 ‘화장’이라는 걸. 똥 누고 오줌 싼다는 말보다 얼마나 고상한가. “화장 좀 고치겠어요.”
일(?)이 끝나면 집 바깥으로 나가는 대문을 연다. 손잡이를 밖으로 내밀때, 바닥에 놓여 있다가 밀리는 신문지 소리, 그리고 다른 날 아침과는 다르게 손아귀에 느껴지는 철문의 묵직함, 뭔가 걸린 게 분명하다. 신문지를 집어들기 전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문고리를 본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까만 비닐 봉다리 하나가 철문 고리에 걸려 대롱댄다. 아마도 그녀가 아침 기도회에 오면서 갖다가 걸어놓은 ‘누룽지’일 것이다.

 

 

 공감미감01.jpg누룽지란, 밥을 짓는 일의 끝마무리다. 누룽지는 밥을 퍼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마이너스 사태다. 누룽지의 양만큼 밥이 줄어드니 말이다. 그래서 이걸 막으려고 눌지 않는 솥을 만든 게 ‘전기밥솥’이다. 이는 물질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전기밥솥이 세상에 나오자 얼마나 환호성들을 질러댔는가. 기능과 경제성의 일대 혁명이었다. 밥 한 톨 냉기지 않고 싹싹 훑어 담을 수 있으니 경제성의 극대화였고, 때마다 해야 하는 수고가 소멸되었으니 기능성의 승리였다. 점점 경제가 성장하고 소비를 산업의 주체로 하는 사회가 시작되면서 숭늉과 누룽지가 사라지고 커피가 등장했다. 숭늉과 누룽지의 몰락과 커피의 등장은 결국 솥단지를 전기밥솥으로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커피라는 음료의 제왕이 우리의 삶속에 등장한 건 이즈음이다.


그러다가 가난한 옛날을 그리워하는 꼰대들이 누룽지탕, 누룽지 과자, 누룽지 차 뭐 이런 걸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옥돌이나 무쇠 솥의 누룽지가 마이너스 현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다. 전기밥솥이 무한한 플러스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밥 알 몇 톨 보태는 대신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솔솔 빼 먹고 있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다. 쫌 유식하게 말하면, 물질문화에 침식되었던 혼들이 정신을 차리고 제 집으로 돌아오려는 것이 아니었다.

 

전기밥솥은 물질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기계 문화의 대명사다. 그러나 무쇠 솥은 마음을 제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정신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라 하겠다. 과하게 말하자면, 커피는 물질문명의 껍질이고 숭늉이나 누룽지는 정신문화의 총아다. 한집 건너 한집 마다 ‘다방’아닌 커피 가게가 생기고 드디어 거피거리도 만들어졌다. 아니, 도시가 온통 커피 천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커피 집 마담이 되려고 하고, 커피를 볶고 내리는 기술자가 되려고 안달이다.


이러니 자칫, 문명의 우승컵이 커피나 전기밥솥으로 넘어가지 않나 싶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우리가 숭늉을 버리고 커피에 홀려 있는 동안, 무쇠 솥을 깨버리고 전기밥솥을 끼고 사는 동안 얼마나 영혼의 풀밭이 척박해졌는가? 무쇠 솥에 밥을 지으며 일부러 누룽지를 눌리는 그녀는 안다. 진정한 플러스는 밥 알 몇 톨의 확보가 아니라 누룽지로의 양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공감미감02.jpg숭늉은 덤덤한 것이다. 톡 쏘는 자극도, 스타벅스의 커피처럼 쓴맛도, 어떤 향기도 없다. 숭늉을 마시기 위해 뭔가를 꾸미지 않아도 되고 패션도 필요없다. 숭늉은 전통적인 삶 그 자체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피는 그 자체가 반전통적인 혼합문화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당장 ‘스타벅스’의 그 ‘스타벅’은 허먼 맬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선원이 이름이 아닌가! 스타벅스의 상표인 ‘엄청나게 유혹을 잘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세이렌’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자다. 숭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요란한 제조 기술과 커피를 담는 용기(用器)의 패션은 심심하기 그지없는 숭늉그릇에 비할 바 아니다. 더군다나 커피의 맛은 한 곳에 붙박혀 있으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엔 같은 맛일 텐데 커피 마니아(狂人)들은 연신 맛의 전전을 요구한다. 겉으로 보기엔 종류도 많고 소재도 다양해서 숭늉에선 찾아 볼 수 없는 선택의 자유와 개성의 특이성이 있는 듯싶지만, 막상 맛은 그 맛이 그 맛이다(적어도 내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포장이요 그 이름이다.

 

선택의 자유와 개성의 차이성, 그 다양성의 철학은 우리가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때 들었던 말이다. 겉으로 보면 다양성이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실제로 속 알맹이는 획일주의로 엮어져 있는 우리의 사회와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 것인지. 커피정치, 커피사회, 커피인간, 커피문화.....그러나 숭늉은 끝마무리의 문화다. 밥을 푼다는 마이너스 요인을 제어 기술을 통해 누른 밥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 요소로 바꾸는 사고의 창조성으로 마음을 제어하는 정신문화를 고양하는 것이다. 정신문화는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커피는 정신의 문화를 지어내는 철학적 질료가 아니다. 단지 오락과 담소의 소비재일 뿐이다. 그러나 숭늉은 인간의 정신문화다. 마이너스 요인을 플러스로 변모시키는 의식의 고양이다.


나도 이제 잡설을 멈추고 그녀가 문고리에 걸어 놓고 간 누룽지나 팔팔 끓여야겠다. 그리고 설설 끓는 누룽지탕을 한 숟가락 퍼서 그 위에 엊그제 강화도에서 실려온 ‘강화 순무 김치’를 얹어 아침 햇살을 한 줌 씹어야겠다. 그 또한 오늘 아침 내 영혼의 ‘화장을 고치는 일’ 이므로.

 

허태수 춘천성암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책과 여러 매체를 통해 삶의 철학과 영성을 일깨우는 글을 쓰고 있다.《영혼의 약국》,《사람이 중심이지요》,《내 생각에 답한 다》 등 여러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