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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내 삶의 전부였다.’
크기변환_김영주.jpg이 한마디가 주는 느낌. 어느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부러움과 그 삶의 무늬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춘천예총이 지역 예술가들의 삶을 깊이 있게 알리는 프로그램으로 ‘사람책’을 진행하는데 11월에 선정된 사람이 무용가 김영주 씨였다. 늦가을 바람이 불어 낙엽이 하나 가득 마당에 쌓이는 오후, 사람책을 읽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만날 약속을 하지 않은 채 나도 ‘사람책’의 여러 독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를 만났다. 김영주씨의 사람책 프로그램에는 무용인들이 적지 아니 찾아왔다. ‘아이구 우리 아이들!’을 연발하는 그녀의 눈빛은 행복해 보였다.
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보아도 태가 난다. 대부분 자세가 꼿꼿하고 화장을 하고 있으며 한국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잘 흩트리지 않는 스타일을 고집한다.  화사한 얼굴 틈에 섞인 내 존재를 발견한 김영주 씨는 과한 반가움을 표현하였다. 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더 반가운 걸까?

 

 

이야기 1 - 눈물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김영주 씨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이다. 늘 수줍은 미소를 짓고 말이 적은, 아니 말을 잘 못 하는 듯한 분위기의 예술가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는 의외로 조금 흥분되어 눈물을 쏟기 시작하며 열렸다.


“나를 위해 이런 시간을 만들어줘서 너무 감사해요. 내 인생에 이런 시간이 처음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춤을 추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편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춤과 예술로 그것을 깨려고 노력했어요.“


김영주 씨는 고교 시절 무용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거역하고 집을 뛰쳐나와 무용을 했다고 한다. 집안 환경은 경제적으로 제법 넉넉하였고, 딸을 외교관으로 키우고 싶다는 기대를 갖고 있던 부모님에게 등을 돌리고 나선 춤꾼으로서의 삶은 그때부터 적지 않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지지를 받지 못한 그녀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지 못한 채 춘천을 무대로 무용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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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 - 무용학원을 경영하며 제자의 성장에 보람
“학원(경희무용학원)을 운영하면서 내가 대가도 아닌데 나에게 춤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지요. 스스로 엄격하게 나를 규제하고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제게 오는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는데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주어서 어떻게 하든 그들을 대학에 보내는데 열정을 쏟았지요.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어요. 여러 아이들의 레슨비를 모아서 대학을 보내는 데 쓰곤 했어요. 당시는 지역에 무용학과가 없어서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해서 재정적으로도 힘이 들었죠.


순수한 아이들이 잘 따르고 성장하는 것이 나의 보람이었어요. 전국 경연대회 등에서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거둘 때 보람을 느끼곤 했지요. 그런데 종종 심사가 편파적이거나 하면 가서 대들고 싸우곤 했어요. 정당하게 실력으로 판단하지 않는 게 화가 났지요.

 

제자들을 열심히 키우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며 살다가 마흔 살이 지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잘못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김영주 씨는 경희무용학원장으로, 강원춤아카데미 원장으로, 또 무용협회 춘천시지부장 등을 맡으며 지역 무용의 지킴이로 성실한 역할을 해 왔다. 전문 무용인이 드물던 시기에 강원도 무용의 버팀목으로 자리하던 시기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길이 하나 열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3 - 편견을 뚫고 나아가는 예술가의 삶
 제자들을 양성하며 무용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도립무용단이 태동하였다. 1999년이다. 1995년 강원대학교에 무용학과가 생기면서 인적자원도 늘어나던 때이다. 강원도는 무용과 국악을 두 축으로 도립예술단을 탄생시켰다. 국악 9명, 무용 10명을 구성원으로 하여 국악에는 신영균 씨가 지휘자로 위촉되었고, 무용에는 도 출신 무용가 지희영 씨를 상임 안무자로, 단무장에 김영주 씨를 위촉하였다. 2000년에 그 틀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여정이 녹녹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대단했어요. 삼류다,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제가 대학의 무용전공자가 아니라서 들어야 했던 소리지요. 하지만 무용단을 일류로 만들면 그런 말도 사라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견뎠습니다. 그러나 실제 무용단 안에서도 (단무장이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제 역할이 없었고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에 오르내리며 무대에 설 기회가 없었어요.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도립예술단의 발족은 지역 예술계에 큰 관심사였고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는 예술계의 관심사였다. 지역에서 무용학원과 무용협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지만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적격 여부를 놓고 적지 아니 입 초사에 올랐던 것 같다.
 
 
 “단무장으로 지내는 동안 허수아비처럼 지내는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전임 단장이 퇴임하면서 새로운 기회가 왔죠.
처음으로 창작무용 ‘새벽의 땅’(2006년)을 올리는 등 단원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며 일했어요. 연거푸 큰 공연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책임만 있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시간이었죠.”


김영주 씨는  도립무용단의 단무장으로 시작해 상임 안무자로서 무용단을 대표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사람책’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털어놓았다. 선임 지희영 씨가 퇴임한 이후 실제 안무자로 활동을 했지만 안무자의 직함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2010년에야 정식으로 그 직함을 받았고 2015년까지 도립무용단을 지켜왔다.
도립예술단의 상징으로 자리해 왔던 김영주, 그 여정은 그녀에게 영광과 똑같은 분량,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그늘이 있었음을 이야기 내내 풀어놓았다. 목소리는 높았고 자신이 받았던 험담을 털어놓을 때는 듣기 민망하여 함께 듣는 이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이렇다 할 학벌과 계보가 없이 오로지 춘천에서 춤을 추어 온 그녀의 이력이 공공의 자리에 나아갈 때마다 스스로를 작고 모자란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고 했다.
 그 모습은 아마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중앙의 인맥이나 학맥 없이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잠시나마 읽을 수 있었다.
 
 
 강원도립무용단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공연 참가 등 굵직한 국내 행사와 일본, 러시아, 베트남, 말레시아 등 외국의 중요 문화사절단으로서 공연을 하고, 창립공연에 이은 창단  창단기념공연을 이어가며 위상을 꾸준히 높여갔다. 무엇보다 강원도가 관여된 각종 행사에 도립무용단은 늘 함께했다.
 그 가운데서도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강원도립무용단의 활약은 눈부셨다.
 2011년 IOC 평가단이 평창을 방문했을 때 등 다양한 행사에서 한국의 고유 몸짓을 통해 강원도, 나아가 한국을 알리는 문화사절의 역할을 해냈다. 또 2014년 3월 소치에서 열린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에서 상설공연을 펼쳐 한국과 강원도 평창을 알렸다. 올림픽과 연이은 패럴림픽 폐막식에서 ‘강원 빛, 하늘을 품다’를 테마로 공연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여는 평창으로 기를 인수하는 것과 동시에 평창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김영주 씨는 지난해 말 삶의 전부였던 도립무용단을 떠났다. 어느새 정년을 맞은 것. 예술가에게 정년이란 낯설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녀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우울증세가 생겨 죽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들었다고 한다.
 
 
 이야기 4 - 앞으로의 삶
 김영주의 삶에는 오로지 ‘춤’이라는 단어만 존재했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재를 털어 공연을 만들기도 자주 했다. 그만큼 춤에 지독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대를 만들어가는 데 쏟는 열정은 고집스럽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하다. 독신인 그녀는 ‘춤’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진실한 마음과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자신을 지켜주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녀는 최근 집을 개조해 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춤을 배우길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춤을 배우고 싶은 누구에게나 가르치고 싶어요. 비전공자들과 함께 강원도 여성들의 춤사위를 만들 거예요.”
 
 
 춤은 여전히 김영주 삶의 존재 이유다. 세상의 편견에 맞닥뜨리며 꿋꿋하게 자신을 길을 가려고 애써온 그녀.
 지금 우리 사회는 ‘족보’, ‘금수저·흙수저’ 또는 ‘학맥’과 ‘인맥’으로 뒤엉켜있다. 그 촘촘한 구조에 놓이지 못한 사람들은 늘 주변인이다.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식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순진하게 춤이 좋아 그것만 잘하면 다른 것은 필요 없을 것이라는 꿈꾸어 온 김영주는 아직 소녀다.
 
 
 글 유현옥 문화통신 편집주간

사진 이수환 문화통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