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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7일 역사적인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자리에 등장했던 평양냉면은 통일음식이라도 되는 듯 인기를 끌었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대표적인 한국음식이

세계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평양’하면 당연히 옥류관 냉면을 떠올리게 되는데, ‘평양막국수’는 조금 낯설다. 그러나 춘천 효자동 문화예술회관 앞 골목에 자리한 ‘평양막국수’는
38년째 같은 곳에서, 같은 모습, 같은 맛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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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국수3.jpg막국수 맛은 ‘먹는 사람 입맛’
막국수 집마다 단골이 있다. 같은 메밀로 만들지만 국수 맛부터 양념지 다양하게 연출된다. 먹는 사람에 따라 육수, 양념(식초, 설탕, 겨자 등)을 가감해 먹는 맞춤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막국수 집을 개업할 때부터 부모님(황봉식ㆍ윤복순, 작고)과 함께 자신의 종잣돈(씨앗돈)까지 보태 만들었고 지금은 운영자가 된 황연희(66) 씨는 평양막국수의 비결을 묻자 “별 특징은 없어요. 화학조미료는 거의 안 쓰고 양념도 많이 안 해 담백한 맛이 특징이랄까…” 처음엔 고기 육수를 만들어 썼으나 한 20년 전부터는 고기육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예 야채 육수를 만들어 쓰고 있다. 처음엔 막국수 위에 계란과 깨, 무절임과 오이를 고명으로 올렸으나 무와 오이 등 채소를 빼 달라는 손님들이 있어 20년 전부터는 야채 대신 김가루를 올린다. 막국수에 올리는 삶은 계란과 무절임은 위를 보호하고 소화를 돕는데 좋다고 한다. 면발은 갓 빻은 속메밀은 뽀얗고 숙성되면 누런빛을 띠게 된단다.


차분한 면발과 슴슴한 양념이 어우러진 막국수는 어르신들의 입맛 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발길도 끌어당기고 있다. 막국수 집을 찾는 젊은이들은 “예전에 할아버지랑 왔었는데…”라며 추억을 떠 올린다.

사십년 세월을 막국수와 함께 한 연희 씨는 ‘막국수 집마다 단골이 있는 건 고르게 장사하고 잘 살라는 뜻’이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강조한다. 1980년 개업할 당시만 해도 춘천시내에는 막국수집이 손꼽을 정도로 네댓집 있었다고 한다. 처음 막국수 값은 1천5백원 정도, 지금은 7천원이다. 춘천에 막국수집이 늘어난 건 경춘선 전철이 개통되는 시기와 맞춰 10년 이내에 많아졌다고 한다. 최근엔 닭갈비집에서 막국수를 겸하는 추세다. 순수 막국수 집은 40~50집 정도로 본다. 춘천이 막국수의 고장이 된 것은 여러 설이 있으나 주위에 화전민이 많아 메밀 생산이 많았으며, 상업적인 장삿길로 들어선 것은 1960년대 소양강댐(1967~1973) 건설을 하면서 당시 정주영 회장이 유포리 막국수집에 드나들게 되면서라고 한다.

 

세자매가 만드는 막국수 집
연희 씨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춘천에 정착한다. 할아버지 고향은 평양이었다. 막국수5.jpg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제화점 등으로 큰돈을 벌어 귀국했으나 북한이 공산화된 뒤 부산, 통영 등지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막내아들이던 아버지 황봉식 씨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 귀국했으나 6.25 전쟁에 참가하면서 직업군인이 되었다. 힘이 세고 성실했던 황 준위의 군대생활 20년은 부하사병의 기름유출 판매 건으로 마감된다. 이후 소방서 생활을 끝으로 하숙집을 하려고 현재의 집(춘천시 명주길 5번길 13-1)을 샀다. 집을 조금 늘리자 옆에 있던 고향친구들(부산)이 하숙 보다는 “예전 평양 아저씨가 국수 해 주던 생각 안 나느냐”면서 그 국수집을 하라고 권했다. 평양말투가 센 할아버지는 평양 할아버지, 평양 아저씨로 불렸으며 평소 국수를 좋아했던 터라 다양한 국수요리를 즐겼다. 50대 초반의 아버지는 막국수 맛만 기억했지 만들 줄은 몰라 당시 약사동 형무소 부근에 있던 막국수 집을 찾아가는 등 발품을 팔며 준비를 했다.

 

처음엔 주방장을 두었으나 예전 먹던 맛이 아니어서 엄마와 딸은 양념 등의 양을 조절하며 옛 맛을 살려냈다. 메밀을 직접 빻아 사용했으나 10년 쯤 지나면서부터는 공장에서 메밀가루를 가져다 썼다. 메밀과 밀가루는 8:2 또는 9:1비율로 섞는다. 힘이 세고 성실했던 아버지는 매번 메밀반죽을 정확하게 250번씩 치댔다. 예전의 나무 분틀로 누르던 방식은 아니지만 지금도 커다란 솥 위에 기계 누름틀이 놓여있다. 연희 씨는 아직도 마지막 반죽은 80번씩 치댄다. ‘막 만들어서 먹는 국수’가 막국수이기 때문이다.

 

9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이웃에 살며 바쁠 때 거들던 여동생 정희(55), 경희(50) 씨가 함께 한다. 둘째 숙희(64)씨는 미국에 살며, 남동생 승용(58) 씨가 직장을 다니며 아침저녁으로 들러 메밀 반죽 치대는 일을 도와준다. 올케 안서연 씨와 조카 황희연 씨도 바쁜 시간에는 함께 한다. 처음부터 가족끼리 운영하는 가업이었다. 본인이 직접 운영하면서 한 달에 2번 쉬는 날을 정했다. 여행은 고사하고 춘천 지리도 잘 모른다며, 친구도 별로 없어 속내를 터놓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침 다섯시 반이면 일어나 장사할 준비를 시작하고 밤 10시에 마무리가 된다. 하루 백명 분 안팎으로 판다. 예전집이라 다 차야 60~70명,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며 손님들이 너무 많이 오는 것도 손사래다.

 

1234.jpg메밀은 ‘구황식품’이자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 
 메밀의 원산지는 동북아시아로 보는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구황식품으로 쓰였다. 세시풍속에서는 ‘메밀은 잎이 파랗고 꽃이 희며 줄기가 붉고 열매가 검으며 뿌리가 노랗다. 이처럼 오색(五色)을 갖춘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하여 먹는 것 이상의 뜻을 부여해왔다. 예전 겨울밤에 부녀자들이 메밀묵 추렴을 곧잘 했던 것도 오방색(五方色)을 갖춘 메밀을 먹으면 아들을 잘 낳는다는 속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강원도 산골에서는 도로리 모임이라고 해서 밤참으로 메밀국수나 메밀묵을 먹어왔다’고 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밤이면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는 메밀꽃밭은 이제 모두의 그리움이 됐다. 메밀은 어릴 때는 나물로,자라서 꽃이 피고 나면 뿌리만 놔두고 나머지는 썰어 솥에 오래 끓여 죽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흉년이 들 때는 메밀대를 삶아 먹기도 하였다. 메밀가루는 뜨거운 물에 타면 곧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비상식량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메밀국수, 막국수, 메밀묵, 메밀국죽, 메밀전병 등 다양한 요리로 활용되며 모가 난 메밀껍질은 베갯속으로 이용돼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식물이다. 메밀은 여름메밀, 가을메밀 이모작이 가능하며 가을메밀이 맛이 좋다고 한다.


1967년 동아일보 ‘내고장의 味覚’에 실린 글이 있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배가 출출해지면 당장에 메밀을 갈아 눌러먹기 시작한 게 이 막국수의 기원이다. 깜박이는 등불 앞에서 메밀을 맷돌에 막 갈아 체로 쳐서 반죽을 갠 다음 나무로 만든 분틀에 눌러 사리를 만들어 막김치를 숭숭 썰어서 얹어 먹는 것이 막국수다.」 질기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담백하고 슴슴한 막국수가, 대를 이어 먹는 막국수가 우리네 ‘소울푸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용자 ‘역사문화 답사’를 진행하며, 강원의 옛길 탐사에 매료돼 있다. 저서로「적멸보궁 순례길을 걷다」,「춘주마실과 이야기」,「푸른별장으로의 초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