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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로 가는 타임머신

레스토랑 '함지'

 

 

 

어린 시절, 졸업이나 생일 같이 특별한 날이거나 시험을 잘 봤을 때만 갈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영양사’라는(마치 보신탕을 팔 것만 같은) 이름의 이 가게는 돈까스 외에도 갈비나 부대찌개를 파는 등 정통 경양식집은 아니었다. 게다가 식탁이 없어서 집에서처럼 상에 앉아서 먹어야 했다. 시골 읍내에 있던 가게였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돈까스를 주문하면 먼저 수프가 나오고 “밥으로 하시겠어요. 빵으로 하시겠어요.”라고 묻기도 하는 등 그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맛본 돈까스도 나에겐 문화 충격이었다. 황금색 돈까스를 서툰 칼질로 썰어 입에 넣으면 바삭한 튀김옷의 기름과 육즙이 뒤섞여 입안을 가득 채웠고 돈까스 위에 뿌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콤한 갈색 소스는 먹다 보면 항상 부족해서 싹싹 긁어 먹어야 했다. 채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뿌린 샐러드도, 예쁘게 깎아 장식한 당근도, 역시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빨간 콩(베이크드 빈스)도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싹 비워 냈다. 그날 이후 나에게 돈까스는 좋은 날에만 먹는 특별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돈까스였지만 세월이 점점 흐르고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90년대 초반까지 흔하게 볼 수 있던 경양식집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밀려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돈까스도 ‘고급 음식’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었다. 몇 년 전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지나가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가게 있던 자리를 찾아가 봤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춘천 중앙시장 부근 농협 왼쪽 건물 2층에 있는 ‘함지’에 들어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1980년 개업한 이 가게는 36년 동안 그 자리와 맛을 지키며 춘천 시민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있는 경양식집이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인생의 특별한 순간마다 늘 함께한 장소이기도 하다. 졸업식, 생일, 맞선, 데이트처럼 금전적으로 조금 힘이 들어가도 되는 특별한 이벤트를 맞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젊은 손님이 많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비스트로와 달리 ‘함지’에는 5, 60대의 연세 지긋한 단골손님이 많다. 어버이날에는 예약이 힘들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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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한 인테리어에서부터 80년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천정의 커다란 샹들리에와 지금은 촌스럽지만 당시에는 눈이 떡 벌어졌을 고급 식탁과 의자는 개점 때부터 계속 사용해 온 것이라 한다. 자리에 앉으면 종업원이 다가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매트를 깔고 물을 따라 준다. 가게가 생길 때부터 동고동락했다는 종업원들에게서 연륜이 느껴진다. 주문을 하면 ‘야채수프’와 ‘크림수프’ 둘 중에 무엇으로 하실 거냐고 묻는다. 어렸을 때는 고민 많이 했겠지만 지금은 바로 ‘크림수프’라고 대답할 수 있다.

상차림도 옛날 그대로다. 모닝빵에 버터와 딸기잼, 주사위 모양으로 썬 단무지, 납작하게 접시에 담은 밥, ‘사라다’라고 부르던 샐러드, 빠지면 섭섭한 김치까지. 하나하나 식탁 위에 놓아 줄 때마다 묘하게 흐뭇한 기분이 든다.

크림 수프를 한 수저 크게 떠서 넣으면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확 퍼진다. 인스턴트 수프는 살짝 단맛이 나는데 이 집 수프는 단 맛이 없고 더 농후해서 좋다. 너무 맛있게 먹다가 밥 말아 먹는 것을 깜빡했다. 양이 많은 편인데도 다 먹고 나면 아쉽다. 늘 그렇듯 한 수저만 더 먹고 싶다.

 

춘천 시민에게 ‘함지’ 추천 메뉴가 뭐냐고 물으면, 다들 첫 번째로 꼽는 것이 바로 ‘함박스테이크’다. 지글지글 끓는 철판에 올려 나오는 두툼한 갈색 고기와 그 위에 얹은 반숙 달걀프라이의 노란색이 식욕을 자극하고, 곁들이로 나오는 당근, 옥수수, 파슬리의 선명한 색 대비도 먹기 전부터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노른자를 깨뜨려 흘러내리게 한 뒤 고기와 함께 먹는 것이 이 집의 ‘함박스테이크’를 맛있게 먹는 필수 공식이다. 소고기만을 사용해 두툼하게 빚은 고기는 탄탄하여 씹는 맛이 있고 씹을 때마다 뽑아져 나오는 육즙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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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로 만들어서 ‘돈까스’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던 ‘비후까스’. 바삭한 튀김옷 속에 촉촉한 소고기가 숨어 있는 ‘비후까스’는 한우 채끝살로 만들었다. 채끝살은 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이 많지 않아 고급 부위로 통하는데, 지방이 적고 연해서 스테이크로 많이 사용한다. 부위를 당당히 메뉴판에 적어 놓은 것에서 재료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육즙도 풍부하고 튀긴 상태도 좋지만 소고기의 진하고 느끼한 맛을 좀 더 강한 소스로 잡아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김치로 손이 많이 가게 된다. 평소 먹던 돈까스나 함박스테이크 말고 색다른 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한 번 먹어볼 만하다.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은 추억 여행의 마무리로 제격이다. 냉기를 지켜 주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그릇에 동그랗게 담은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기름으로 코팅된 입안을 시원하게 헹궈 준다. 단맛이 싫다면 커다란 포트에 잔뜩 끓여 놓은 옛날식 원두커피도 좋다. 계산을 마치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가면 다시 201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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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지역마다 대표 경양식집이 남아 성업하는 것을 보면 내 추억을 보관해 주는 곳이 있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함지’는 맛 자체로도 뛰어난 곳이지만 36년 동안 춘천 시민들의 추억 저장고로도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흔들림 없이 지켜 온 공간과 사람, 기억이 앞으로도 ‘함지’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 / 그림  이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