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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14:49

공백의 맛, 평양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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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의 맛

'평양냉면'

 

 

최근 떠들썩했던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지켜보면서 안타깝다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든 생각이 있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만나지도, 심지어 살아있는지도 몰랐던 상태로 지내던 가족이 그런 시간의 장벽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이인 양 자연스럽게 지낸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60년의 공백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을 수 있는 가족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산가족에게 공백의 시간은 상처이자 아픔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 근현대사의 애환이기도 했다. 이를 대변하는 음식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춘천시 사농동 청소년 여행의 집 맞은편에 있는 ‘평양냉면’은 1946년 1대 창업주인 유진실 할머니가 평안남도 맹산에서 영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춘천으로 피난 와 지금의 도청 근처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해 3대가 운영하는 현재 위치로 옮겨오기까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산가족은 아니지만 실향민으로서 겪어 온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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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가게가 대부분 그렇듯 평양냉면도 허름한 외관을 자랑한다. 별다른 꾸밈없이 그냥 ‘平 壤 冷 麵’이라고 툭 던져 놓은 듯한 지붕 위 간판은 무심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한여름에는 한참 기다려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겨울철에는 비교적 한산하다. 냉장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냉면은 겨울철 음식으로 통했다.

메뉴는 단출하다. 가게의 얼굴인 평양냉면과 비빔냉면, 육개장, 설렁탕, 빈대떡 정도. 겨울 메뉴인 만둣국과 전골 비슷한 어복쟁반이 특별 메뉴다. 평양냉면은 소담하게 담은 연한 갈색 면, 찰랑거리는 뿌연 육수가 단순하면서도 묵직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조 포수’로 이름 날리던 2대 주인이 잡아온 꿩고기를 우려낸 육수를 사용했지만, 조달이 어려워지자 토종닭으로 바꿨고 현재는 한우 부채살과 양지를 푹 끓여 낸 육수에 동치미를 섞어 사용한다고 한다. 고기의 감칠맛과 동치미의 새콤한 맛이 잘 어우러진 육수는 말 그대로 ‘슴슴’하다. 처음 먹는 사람은 ‘이 맛이 다인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어딘가 허전하다. 하지만 그 비어 있는 맛이 평양냉면 마니아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포인트다. 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 사용해 질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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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냉면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냉면에 대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다. 이 책에서는 각 절기에 따른 대표 음식을 소개하는데, 11월의 음식으로 냉면을 든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조선 후기일 뿐, 우리가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고 추정되는 시기는 그보다 훨씬 앞선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시대, 메밀의 원산지인 몽골에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냉면이 서민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냉면은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반죽을 나무로 된 분통에 넣고 장정 두 명이 달라붙어 눌러야 겨우 뽑아낼 수 있었다는데, 냉면 한 그릇에 들어가는 수고와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기계식 제면기가 보급되면서 서민음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시 평양은 질 좋은 소고기와 메밀 산지로 유명했다고 하니, 평양냉면이 다른 냉면을 제치고 냉면의 대명사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시 춘천의 ‘평양냉면’으로 돌아오면, 아는 사람만 시켜 먹는 숨겨진 메뉴가 있다. 메뉴판에도 없는 ‘밥말이 냉면’이다.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늘 배고팠던 일꾼들의 요구로 탄생한 음식이라고 한다. 평양냉면에 밥 한 덩이가 함께 말아져서 나오는데, 차갑고 새콤한 육수에 말아 먹는 밥맛이 이색적이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만둣국을 찾는 사람도 많다. 직접 빚은 큼지막한 손만두가 듬뿍 들어간 만둣국은 진하고 구수하다. 배추와 두부, 고기 등으로 소를 채웠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건강한 맛이다. 바삭하면서 기름진 빈대떡은 평양냉면과 함께 먹기 딱 좋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5개가 나오는데 작아서 덜어 먹기도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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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은 호불호가 제법 갈리는 음식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깊이 있는 맛이라며 찬양하는 사람과 도저히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극명하게 나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평양냉면이 미식가를 구별하는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밋밋한 것이 자기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면 미묘한 맛의 차이를 모른다거나 애들 입맛이라 그렇다는 등 질책 아닌 질책을 듣기도 한다. 각자 취향이 있고 쌓아 온 맛의 경험이 다르니 미각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이산가족 상봉과 하루가 다르게 겨울의 기운이 선명해지는 요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평양냉면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6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춘천의 평양냉면에 들러 ‘공백의 맛’ 속에 숨어 있는 역사와 여운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글ㆍ그림: 이재화

 

 

‘평양냉면’ 정보

  주소: 강원도 춘천시 사농동 217-13

  전화번호: 033-254-3778

  대표메뉴: 평양냉면(8,000원)/ 비빔냉면(8,000원)/ 빈대떡(8,000원)/ 만둣국(8,000원)

  영업시간: 11:00~19:30(연중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