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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고 나누는 음식

설렁탕

 

 

 

겨울이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1월 말답지 않게 훈훈하네, 역대 가장 따뜻한 수능이었네, 지구온난화네, 하면서 겨울답지 않은 날씨를 놀리듯 입에 담은 것이 무색하게 하룻밤 사이 바람은 한층 날이 섰고 눈도 내렸다. 금토 마당에 심어 두었던 반야생 배추는 된서리를 맞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설렁탕이 절로 생각나는 계절이다.

 

설렁탕은 소뼈를 물에 넣고 푹 고아서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예전에는 머리, 내장, 발 등 소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었지만 머리와 내장에서 누린내가 난다 하여 지금은 거의 넣지 않고 양지나 사태 등의 살코기를 함께 준다. 고기를 이용해 만드는 곰탕이 비교적 말갛고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것에 비해 설렁탕은 우유처럼 뿌연 국물이 특징이다. 맛도 곰탕보다 가볍고 개운하다. 소면과 밥이 따로 나오거나 처음부터 국에 담가서 나오는 집도 있다. 파를 듬뿍 넣으면 소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잡을 수 있다.

 

설렁탕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김치다. 가게에 따라 깍두기, 배추김치, 석박지 등이 나오는데 구수한 설렁탕 국물과 매콤 새콤한 김치의 딱 떨어지는 맛을 무한반복하다 보면 금세 설렁탕 한 뚝배기가 비어 있다. 의도치 않게 헐레벌떡 식사가 끝난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설렁탕을 포함한 국밥이 ‘한민족의 패스트푸드’라고 비유했는데, 그 말이 딱 맞다.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부어 시큼한 맛을 즐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렇듯 서민의 사랑을 받아 온 음식이지만 최근 몇몇 비양심적인 가게 때문에 ‘믿고 먹기 어려운 음식’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뽀얀 국물 색과 감칠맛을 내기 위해 돼지뼈를 섞어 쓰거나 프림을 탄다는 얘기는 이젠 누구나 다 알 정도다. 집에서는 소뼈를 아무리 오랫동안 고아도 식당에서 파는 유백색의 국물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뽀얀 국물이 가득 담긴 설렁탕이 내 앞에 놓이면 왠지 모를 찜찜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는 것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런 의심을 조금이나마 거두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았다. 원래 제대로 끓인 설렁탕은 우유처럼 뽀얀 것이 맞는단다. 집에서 잘 안 되는 이유는 화력 때문. 또한 정말 잘 끓인 설렁탕은 단맛도 난다고 한다.

 

설렁탕.jpg

 

 

‘설렁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직도 의견의 분분하다. 가장 많이 듣는 것이 ‘선농단’ 설. 조선시대 왕이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에서 제례가 끝난 뒤 소를 잡아 탕을 끓여 백성에게 나눠 줬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몽골의 음식 ‘공탕空湯’에서 왔다는 가설도 있다. 고려시대 100년이나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고려 말에는 ‘몽고풍’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육류가 주식인 몽골의 음식 문화가 퍼졌을 것을 생각한다면 꽤 타당성 있는 주장이다.

기원이 어찌 됐든 한반도는 선사시대부터 소를 가축으로 키웠으므로 이름이 설렁탕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음식은 아마 제법 오래전부터 먹어 왔을 것이다. 농사짓는 데 필수적 노동력이었던 소를 자주 먹을 수는 없었겠지만, 구이나 조림에 비해 양을 많이 늘릴 수 있는 설렁탕은 주로 백성들이 먹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설렁탕이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은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조선우’를 대량으로 사육했다. 당시 소고기는 돼지고기보다 값이 더 쌌을 정도라고 하니 소고기에 물을 부어 푹 끓인 설렁탕이 양과 맛 모두를 만족시키는 서민의 대표 음식으로 떠오른 것도 당연하다. 1924년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마지막 대사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은 그 당시 서민의 비극과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큰 가마솥에 팔팔 끓여 모두가 나눠 먹는 설렁탕은 오랜 시간 서민과 함께해 온 대중 음식이자 나눔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이었다. 선농단 터가 남아 있는 서울 동대문구에서는 매년 4월 선농제를 올리고 주민들에게 설렁탕을 나눠주는 행사를 연다. 아직도 예식장에 가면 잔치음식으로 설렁탕이 나올 때가 있다.

경제 불황 탓에 2013년에 비해 기부가 10% 이상 줄었다는 기사를 봤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먹고살기 힘들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힘들 때나 좋을 때나 서로 돕고 나누는 게 일상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 마음마저도 얼어 버린 듯하다. 차갑게 언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따뜻한 설렁탕 같은 넉넉함과 베푸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