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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의 소울푸드

막회 또는 물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강원도 동해에 있는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다음 날 아침에 이렇게 물으셨다.

“너, 회 먹을래?”

“네? 회요?”

아니 바다가 코앞인 묵호라지만 어떻게 눈 뜨자마자 회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역시 바닷가는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내심 횟집에서 나오는 화려한 회를 기대하며 ‘네.’라고 대답했다. 얼마 뒤 어머님이 들고 오신 쟁반에는 내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물이 올라 있었다.

 

채 썬 오징어와 썰지 않은 채소, 국그릇에 수북하게 담은 밥, 초고추장, 빈 그릇 여러 개. 시댁에서 느낀 문화충격 중 하나였다. 어떻게 먹는 건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다들 거침없이 재료들을 빈 그릇에 넣고 쓱쓱 비벼 드시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바닷가에 왔다는 사실을 한 번에 깨닫게 하는 꾸밈 없는 가정식, 입맛 없는 아침에도 식욕을 자극하는 새콤한 향과 오징어의 미끈한 식감. 그 뒤로 시댁에 가면 은근히 아침에 먹는 막회를 기대하게 되었다.

                                                                                            

사실 시댁에서는 ‘막회’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 음식에 맞는 이름을 찾아서 내가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이다. 시댁에서는 이 음식을 그냥 ‘회’라고 부른다. ‘오징어회’라거나 ‘오징어 물국수’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고유명사로 사용할 만큼 오징어회는 시댁에서 가장 빈번하게 먹는 회다. 아마 바닷가 마을에는 집집마다 자기 집만의 막회 레시피와 그걸 부르는 고유한 이름이 있을 것이다.

 

물회는 바닷가 근처라면 어디나 있는 음식이다. 포항이 원조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상품화된 음식을 말하는 거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오래전부터 먹어 왔을 거라 추정한다. 어부들이 상품 가치가 떨어지거나 팔고 남은 해산물을 한 끼 식사 대신 처리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회는 주로 코스로 나오는 일반 횟집의 회에 비하면 담음새가 투박하다. 지금은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수많은 물회 맛집이 줄줄이 뜰 정도로 전국적인 여름철 대표 음식이 되었지만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비싼 회 대신 먹는 저렴한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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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고성 한 음식점의 화려한 물회. 물회는 더 이상 싸구려 음식이 아니다.

 

시댁에서는 이 막회를 주로 아침에 먹는다. 집에서 도보로 왕복 1시간 거리에 있는 묵호항에서 어머님이 새벽장을 봐 오신다. 오징어는 어판장 아주머니에게서 손질해 올 수도 있지만, 어머님이 직접 채를 쳐 주시는 편이 더 맛있다. 가늘지 않아서 입안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식감이 좋다. 손질하신 오징어는 다리와 몸통을 구분해서 넓은 채반에 담아 오신다. 채소는 따로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날 먹다 남은 걸로도 충분하다. 청양고추와 마늘은 고기 먹을 때처럼 썰고 상추와 깻잎은 각자 손으로 북북 찢어서 넣는다. 양파가 있으면 양파도 넣고 아버님이 따 오신 오가피잎이나 수애나물, 이름 모를 푸성귀를 넣기도 한다. 거기에 밥과 초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으면 회덮밥인 거고 물을 말아 먹으면 물회인 거고 밥을 안 넣으면 비빔회인 것이다.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먹으면 된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온 가족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심플한 맛을 좋아하시는 아버님은 오징어랑 청양고추 위주로 드시고 밥은 넣지 않으신다. 어머님은 상 위에 있는 재료를 다 넣으셔서 푸짐하게 드신다. 남편은 고민 없이 한 번은 회덮밥 한 번은 물회를 만들어 두 가지 맛을 다 즐긴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시누이는 청양고추랑 마늘을 듬뿍 넣으신다. 김 서방님은 물회집에서 먹듯 소면을 넣어 드시는 걸 좋아한다. 선호하는 부위도 제각각. 쿰쿰한 맛을 좋아하는 중2 조카는 머리랑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나는 아직 나만의 맛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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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면을 넣고 비빈 오징어회. 김 서방님 스타일이다.

 

아마 어머님은 우리 집 대표 음식으로 막회를 소개한다고 하면 펄쩍 뛰실지도 모른다. 가족끼리 있을 때만 간단히 먹는 음식이지 남에게 보일 만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이 만드시는 수백 가지 음식 중에서 나는 막회가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소울푸드’라고 생각한다. 싱싱한 오징어회를 먹이고 싶으셔서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거리도 마다치 않고 다녀오시는 어머님의 마음. 결과물은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고급 일식집 못지않은 정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시댁의 아침‘회’는 단 한 번 만에 내 소울푸드로도 자리 잡은 것 아닐까.

                                                                                   

 

글/사진 이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