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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의 질긴 인연

감자옹심이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뭐가 있을까? 춘천의 닭갈비? 강릉의 순두부? 아니면 신선한 활어회? 강원도 각지의 다양한 대표 음식이 있지만, 강원도 전체를 놓고 봤을 땐 단연 ‘감자’라 할 수 있다.

감자는 언제부터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된 걸까.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감자의 역사는 그리 긴 편은 아니다.

감자는 1824년~1825년경에 조선에서 산삼을 찾기 위해 숨어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몰래 경작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에서 대규모로 감자를 재배하게 된 것은 이보다 100년 정도 뒤인 1930년대로,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에서 농업 연구를 하던 독일인 매그린이 개발한 품종을 심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채 200년이 안 된다.

 

강원도의 대표 작물로 100년 넘게 뿌리 깊은 인연을 맺어 온 감자는 강원도의 주식이자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자’가 주는 이미지는 주로 부정적인 것이 많다. 어려운 시절 배를 채워 줬던 구황작물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일까. 흙이 묻은 투박한 모습 때문일까. 감자는 배고픔과 가난, 무식함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사과 같이 생겼다 하면 칭찬이지만, 감자 같이 생겼다는 말은 욕이나 다름없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에서도 감자밭은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장소로 사용된다.

인터넷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강원도에선 화폐 대신 감자를 쓴다면서요?’라는 댓글도 달릴 정도다.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라 피식 웃고 넘어가지만, 강원도와 감자가 더해져 뭔가 미개하고 무지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한편에서는 감자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하기도 한다. 강원문화재단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여는 감성 자극 콘서트 ‘감자콘서트’는 강원도의 대표 작물인 감자를 클래식 음악회와 접목해 지역 문화 코드로 사용하고 있다. 강원도지사인 최문순은 별명인 감자의 우직하고 든든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 연임에 성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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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감자와 근현대사를 함께해 온 덕분에 강원도에는 저절로 감자를 활용한 수많은 음식이 생겨났다. 막국수의 단짝 감자전, 고속도로 휴게소의 별미 감자떡, 구수한 감자막걸리, 이름에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감자붕생이, 감자범벅처럼 강원도의 감자 요리는 이름도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 감자로 만드는 겨울 음식이 ‘옹심이’다. 옹심이, 옹심이. 입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귀여운 발음처럼 모양도 작은 눈덩이마냥 동글동글 사랑스러운 감자옹심이는 감자를 곱게 갈아 물기를 꼭 짜낸 건더기와 물에 가라앉은 녹말가루를 섞어 동그랗게 빚은 새알심을 멸치 육수나 들깨국물과 함께 끓여 먹는 강원도의 향토 음식이다. 겉보기에는 소박한 한 그릇이지만, 알게 모르게 정성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가정집에서 잘 해 먹지 않는 요리가 됐다.

 

입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씹으면 떡처럼 쫄깃한 식감의 새알심은 고소하긴 하지만 맛 자체가 연해 면처럼 국물과 잘 어울린다.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에서는 멸치와 채소로 육수를 낸 맑은 국물로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강조하고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지역에서는 들깨를 섞은 걸쭉한 국물로 구수함과 볼륨감을 자랑한다. 춘천의 옹심이 맛집 ‘춘천옹심이’에서는 들깨국물에 옹심이와 메밀칼국수를 함께 넣어 주는데 ‘옹심이메밀칼국수’ 메뉴가 인기다. 후루룩후루룩, 곧장 넘어가는 칼국수와 오물오물 천천히 넘어가는 옹심이의 매력을 둘 다 느낄 수 있어 즐겁다.

추운 겨울, 뜨끈한 국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옹심이를 한 알 건져 호호 불어 가며 먹는 맛은 각별하다. 옹심이 속 깊이 파고든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거쳐 위로 내려가는 걸 느끼면 ‘아, 겨울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밖에 눈이라도 내리고 있으면 금상첨화.

 

감자옹심이가 강원도만의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 감자옹심이는 감자보다 고구마를 주로 키우는 전라도와 경상남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도 오래전부터 먹어 왔다. 겨울에 감자를 수확하는 제주도에도 유명한 감자옹심이 맛집이 많다. 경상북도가 고향인 어머니도 내가 어렸을 때 가끔 멸치국물 감자옹심이를 끓여주셨다.

멀리 이탈리아에도 감자옹심이와 비슷한 요리가 있다. 삶은 감자를 으깨 밀가루를 섞어 동글납작하게 반죽해 크림소스나 토마토소스를 얹어 먹는 ‘감자뇨키’다. 밀가루가 들어가 옹심이처럼 투명하지는 않지만 쫀득한 식감과 구수한 뒷맛이 감자옹심이와 닮았다. 얼마 전에는 유명 셰프가 강원도에서 생산한 옹심이로 만든 ‘감자옹심이뇨키’ 레시피가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뇨키.jpg

 

길지 않았지만 깊고 질긴 인연으로 강원도와 함께해 온 감자, 그리고 강원도의 긴 겨울을 녹여 준 감자옹심이. 찬바람이 불어올 때가 되면 저절로 뜨끈한 감자옹심이가 생각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글 ㅣ 이재화 문화통신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