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글씨와 잉크

2012.07.10 10:40

문화통신 조회 수:9185

‘글씨는 사람을 보여준다. 반듯하고 크게 쓰거라.’

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글씨를 자주 검사하셨다. 너무 작게 쓰면 속이 좁아 보이고 휘갈겨 쓰면 사람이 반듯하지 않다는 것이 아버지의 글씨관상이셨다. 이런 아버지의 글씨 교육 탓일까, 나는 초등학교 때 경필부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고, 동생에게 말하니 그도 그랬다고 한다. 잘 쓰는 글씨는 아니지만, 반듯하고 작지 않게 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허지만 지금의 내 글씨는 정자체가 아니다. 늘 마감시간에 쫓기는 급한 마음으로 쓰는 탓에 흘림체이다. 더러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는 핀잔을 듣곤 한다.

그러나 그 글씨도 이제는 별반 드러낼 일이 없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서, 한글 프로그램의 서체대로 선택한 프린트물로 드러나는 글씨에는 나의 모습이 가려있다.

 크기변환_꾸미기DSC_0562.JPG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잉크와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제법 값을 하는 그 만년필이 무척 반가웠다. 오랜만에 잉크냄새를 맡고 펜촉의 감촉을 느끼며 이것을 어떻게 써야하나 설레었다. 때마침 결재 하는 일이 많던 터라 결재란에 멋진 사인을 날려야지 하며 몇 번 멋을 부려 사인을 해봤지만, 그 일은 곧 시들해졌다. 나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펜글씨의 맛을 겨우 공문서의 결재란에 쓴다는 것에 흥이 나지 않았다.

펜글씨는 만년필의 펜촉보다는 잉크를 한 점 한 점 찍어가며 쓰는 것이 더욱 섬세하다. 얼마 전 이 펜촉도 그 지인으로부터 얻었다. 아직 잉크를 묻히지 않은 펜을 만지작거리며 펜글씨에 대한 그리움을 키운다. 갖은 장식의 펜대가 있었는데…학창시절엔 모나미볼펜 뒤에 펜을 끼울 수 있었다. 그래서 펜촉을 끼워서 볼펜도 쓰고, 펜글씨도 쓰던 기억이 새롭다

교복에 저꾸 잉크를 묻혀 애태우던 중학교 학창시절, 영어를 배우기시작하면서 펜글씨 맛을 새록새록 느끼던 기억…‘아예 깃털 펜대를 하나 구할까?’ 생각은 자꾸 확장되지만 정작 펜글씨를 쓸 일이 없다는 것에 마음이 허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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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글을 적지 않게 쓰는 요즘이지만 만년필이나 펜촉으로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선물로 받은 잉크는 여전히 양이 줄지 않고 장식물로 책상위에 자리한다.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중간, 또는 기말 시험을 보는데 그때 드러나는 학생들의 글씨가 종종 마음을 흔든다.

혹, 내용이 부실하더라고 또박또박 정자체로 정성들여 쓴 글에는 마음이 가는 것이다. 글씨를 보지 말고 내용을 보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스리지만 글쓴이의 특성을 읽을 수 있는 글씨가 내용을 압도할 때가 있다. 그래서 슬그머니 잘 쓴 글씨에 점수가 더해지는 것을 어쩌랴.

제 손으로 글 쓰는 일이 드물어 글씨쓰기가 예전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잘 쓴, 자신감 있는 글씨체에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