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

2008.06.05 16:02

문화통신 조회 수:8919

주판


 초등학교 특활시간에 배웠던 과목 중에 주산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글씨는 사람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것이므로 크고 반듯하게 써야 한다’고 교육하셔서 나는 펜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경필부에 들어간 적이 있고, 또 셈을 잘하고 두뇌발달에 좋다는 주산반에도 들어갔었다.


 남들처럼 급수를 높은 단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지만  4,5학년 어디쯤에서 주산반에서 열심히 암산을 놓기도 하고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배웠던 기억은 뚜렷하다. 당시 셈을 하기위한 기본 도구였던 주산()에 능통한 사람은 머리좋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맘으로 주산반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이 그래도 상위권이었으므로  주산반에 있다는 것은  그 성적과 함께 상위층이라는 증명처럼 여기는 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주산반에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언제 배웠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의 속도로 주판을 만지는 그들은 정말 영재처럼 보였다.  학교 대표로 주산경시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고 돌아와 전교 조회시간에 상장을 받는 그들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상위급수를  보유한 선수들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속성으로 주판을 가지고 계산을 해내는 솜씨는 정말 신기에 가까웠다.

 주산선생님이 여름날 창가의 바람에 의지하여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셈을 위해 ‘1원이요, 2원이요…’ 하면서 낭랑하게 숫자를 부르던 시간이 내 기억의 한편에 흐릿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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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내게  희망과 절망을 주던 주판이 사라진 것은 정확히 언제쯤일까?

 기록에 의하면 1980년대부터 전자계산기가 나왔다고 하니 그 때부터 주판은 우리들 일상에서 차츰 멀어졌을 것이다.


 
요즘 나는 계산기가 없으면 덧셈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숫자에 예민하지 못한데다 계산기를 늘 붙이고 살다보니 굳이 암산을 할 일이 없고 계산능력은 더욱 퇴화되어 간다. 슬픈 것은 간단한 숫자의 덧셈이나 뺄셈을 머릿속으로 하는 것 보다는 계산기를  스스로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는 주판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늘 주판을 몸에 붙이고 사셨다. 하도 오래 써서 주판의 한 귀퉁이가 부러져 고무줄로 묶어 두시고 주산알이 반질반질해진 아버지의 주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에게서 그 주산은 아주 가까운 생활도구였다.  연세가 드셔서는 곧잘 계산을 잘못하셔서 어머니에게 핀잔도 적지 아니 받으셨던 아버지는 계산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판을 참 오래 가지고 계셨다. 가난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그 주판은 내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주판은 네모난 틀에 가로선과 세로선 안에 알들이 빼곡이 차있다. 가로선 윗줄에 있는 알들은  다섯 단위를 표시하고, 아랫줄은 1단위를 표시한다. 4알을 놓고 다섯으로 올라가면 아랫줄을 털고 윗줄의 알을 올린다. 또 왼쪽으로 갈수로 십진법 단위의 숫자를 의미하는데  아래 알들은 4알짜리와 다섯알짜리 두종류가 있다. 1930년대까지는 아래가 다섯알이었다가  4알짜리로 표준화 되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주판은 아래가 다섯알 짜리였다.


 자식들에게 한없이 관대하시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였지만  주판을 만질때는 옆에서 떠들거나 말을 건네면 큰 역정을 듣곤했다. 그 때는 참 다른 모습의 아버지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며 입을 삐죽거리고 아버지 곁을 비껴났지만 지금은 안다. 수지가 잘 맞지 않는 답답함을 그 주판의 알들을 털어내며 자신의 삶의 무게도 털어내고 싶었을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숫자에 능숙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주판, 나는 그저 거기에서 성실함만을 간직하려고 한다.


2007년 8월호(문화통신 계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