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2009.09.08 17:24

문화통신 조회 수:7087

 

  추억창고를 뒤지기 시작하면서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6.25전쟁 가운데 북한에서 홀로 나오셔서 외로움을 참 많이 타셨고, 그 때문인지 가족애가 남다르셨다.


감정표현도 어머니보다 더 섬세하셔서 자녀들이 학교에서 늦게 귀가하면 마중을 나오기도 하시고, 당신의 결혼기념일을 집안의 중대 행사로 여겨 가족사진을 찍거나 외식을 즐기셨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시랴, 우리 4남매를 기르시랴 정신이 없으시던 어머니는 우리의 부족한 것을 한없이 채워주셨기 때문에 다 성장한 우리 남매들은 아직도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퍼주시던 어머니의 그 능력은 아버지보다 더 강해보이기도 했었다.


 몽당연필.gif 얼마 전, 어느 기관에 들렀다가 기념품으로  연필을 하나 가득 선물 받았다. 기관의 로고가 찍힌 이 연필을 보니 흡사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쓰던 연필 분위기가 났다. 종이를 압축해 만든 듯한 아주 오래된 물건의 느낌을 주면서 정감이 갔다.

 모든 생활용품들이 그리 충족치 않았던 시절,  필통에 넣고 다니면 금방 곯아서 심이 자주 부러지곤 했던 내 필통의 연필들….
그 연필은 묘하게 옛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예뻐서 동생에게도 몇 자루 주니, 동생도 단박에 옛날을 이야기한다.
“어머나, 이 연필 우리가 쓰던 연필 같다. 우리 어릴 때 아버지가 입학기념으로 연필에 이름 새긴 연필을 선물하셨던 기억나?”
 비슷한 세대를 살았건만 이 말을 듣던 주위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연필에 자기 이름을 새겨서 쓴다는 것을 쉽게 꿈꾸기 어려웠던 시절에 이런 호사를 누린 것이다. 아마 그리 큰  돈이 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 자매들은 그 이름이 새겨진 연필을 가지고 얼마나 으스댔을까, 옛 추억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필기구도 나날이 발전하지만 연필을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래서 요즘도 필통을 갖고 다니는 나는 필기도구에 꼭 칼로 깎을 수 있는 연필 한자루쯤은 가지고 다닌다.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질 때 연필을 맵시나게 깎고 심을 날카롭게 세워 필통에 담는 기분을 요즘 아이들은 모른다. 나는 요즘도 책에 줄을 긋거나 메모를 할 때면 잘 깎인 연필을 즐겨 사용한다.


 연필 욕심이 많은 내 연필꽂이에 어느새 하나 가득 몽당연필들이 쌓였다. 볼펜 껍데기를 씌워 쓰고 또 쓰던 기억, 지겨워서 버릴라치면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던 기억, 쓰임새가 점점 적어지는 연필이 어느새 추억 창고의 물건이 되어버렸다.

 

한 꾸러미나 되어버린 몽당연필을 자꾸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