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대한 도전-못난이 인형

2008.05.27 17:05

문화통신 조회 수: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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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인형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은 예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요즘은 조금 그 의미가 진전되어 정형화되었다는 의미도 함께 쓰이는데 예쁘다는 의미는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인형의 종류가 다양해져 팔다리를 움직이고 울거나 말을 하는 인형, 수십가지 살림살이를 가지고 있는 인형 등 형태나 기능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나의 성장기 인형들은 대부분 서양 여자의 아름다움이 미의 상징인 것처럼 학습시켰던 것 같다. 유년시절에는 인형이 그리 흔하지 않았고 종이 인형을 많이 가지고 놀았고 많은 가정에서 집안의 장식물로 인형을 진열해 놓았었다.


우리 집에는 잘록한 허리를 과시하는 흰 드레스를 입은 서양 인형이 유리케이스에 들어 있었는데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그 인형은 눈의 얼굴의 3분의 1쯤은 되는 것 같은, 큰 눈에 기다란 속눈썹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인형들은 모양은 조금씩 달랐지만 60, 70년대 한국 가정의 안방에서 우리들에게 서양적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이 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등장한 것이 바로  못난이 인형이다.


이 인형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반이라고 하는데 내가 만난 것은 아마 중반쯤 되는 것 같다. 선물로 받은 이 못난이 삼형제는 그야말로 ‘깨는’ 대상이었다. 하나는 울고, 하나는 화내고, 또 하나는 환하게 웃고 있다. 얼굴에 주근깨도 있고 잔뜩 부풀어 있는 볼에는 심술이 가득해 보이던 못난이 삼형제는 엄마의 화장대 위에 꽤 오래 자리를 차지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놈들의 표정에 점점 무덤덤해지기는 했지만 심심한 오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이 못난이들은 아마 유리상자안의 인형보다 훨씬 더 나와 내 형제 자매들의 손을 탔던 것 같다.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꼬집어주고 싶고 달래주며 함께 놀고 싶은 존재로서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있었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학습하고 있을 때 그 고정관념을 깨 주었던 못난이 인형, 못생겨서 더 편안하고 가까이 두고 싶었던 마음은 사람 사는 관계에서도 작동하는 것 같다.


‘오래된 물건’을 보물창고처럼 싸두고 있는 김덕현 씨의 창고에서 만난 이 ‘추억’이 나를 그 인형을 만났던 70년대- 판탈롱바지에 통굽구두로 키를 늘리며 멋을 부리며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200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