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 품걸리 이장
객지생활 모른 채 고향에 뿌리내리고 사는 삶

 

김호성(60) 이장은 조상 대대로 품걸리에 거주한 품걸리 토박이다.
4대 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 2남 1녀 중 장남으로 누님은 결혼으로, 남동생은 학업으로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80년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현재 마을에서 이장을 지내며, 마을의 우체부 일도 맡아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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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앙강 댐건설로 물에 잠긴 모교 품안초등학교
학교는 지금 호수에 다 들어가 있어요, 나는 졸업하고, 동생이 마지막 졸업. 품안 초등학교 마지막 졸업생이 된 거지. 나는 22회고, 동
생이 26횐데, 26회가 마지막 저거(졸업)지. 물에 잠기면서 그게 다 올라왔지. 저기 있는 저 학교가 그게 우리 학교야 우리 모교야. 초등
학교가 없어지고 작아지면서 분교가 됐다가, 만천초등학교 품안분교라구 하다가, 야중(나중)에는 그것도 없어지고 그랬지.


70년도 정도만 해도 유일하게 품걸리에서 객지라는 걸 모르고 살았어. 다른 사람들은 나갔다가 객지 생활 좀 했다가 들어 오구 그랬
는데, 나는 아예 대문을 나가 본 적이 없어. 아버님이 엄청 엄중하셨어. 장남이라는 그런 사명감이 머리에 세뇌가 되다시피 그런 거 같
애. 감히 내가 어디 간다구 아부지한테 말씀 한 번 드려본 적두 없구.


댐 생겨 길 막히자 뱃길과 새 길 열려 물차고 나서 배 탄 거야. 물을 막고 나서는 도로가 망가지니까는, 가리산까지는 도로가 있었어요. 일본애들이 닦아 놓은 길이 있는 거를 정책적으루다가 저 철정, 홍천서 홍천, 인제 들어가는 저 철정검문소라는 큰 검문소가 있다구. 거기 검문소 앞으루다가 길을 냈어.


근데 그 도로가 악도로야 악도로. 아주 일반차는 못 다녀. 사륜차만 다닌다구. 제무시(GMC). 차량이라는 게 없으면 일을 못 하잖아요. 70년대 그 도로가 개통됐는데 우리가 뭘 싣고 그래두, 홍천으루 돌아가야 되니까는 너무 거리가 멀구, 그래 가지구 도로를 내달라구 엄청 건의를 했어요. 그래 가지고 이뤄진 게 88년도에 이뤄진 거예요. 그래서 도로 명칭이 88도로야. 많이 좋아졌지. 가깝구.


배가 옛날에는 하루 세 번씩 운항을 했었어. 오전, 정오, 오후루다가 나눠서 했는데, 그 때만해도 손님이 많았어요. 배가 운항이 되니까는 생활물품은 배루다가 다 된 거지. 얼마나 고달픈지 몰라. 원래는 여기 품걸리가 옥수수, 콩 주 단지야. 그래서 수매를 하며는 화물선으루 콩, 옥수수가 엄청나게 나갔어. 운반이 오로지 배루다가 수송이 되니까는, 여기서 탈곡을 해 가지구 배터깨 나가서 배에다 싣구, 배에서 또 내려 화물차에
싫어서, 아주 그냥 녹초가 되는 거야. 한가마니를 한 거를. 지금은 자동차에다 딱 실어 보내면 되지만은….
아직도 겨리쟁기로 밭갈고 농사지어 겨리(소두마리가 끄는 쟁기)는 아마 동면 관내 이쪽에선 없을 거예요. 저 밖에…. 배웠다는 건…어차피 뭐 배운 건 배운 거지마는, 저는 이 농업이 싫어가지고 한 때는 뛰쳐나가 볼라고, 한 번 바깥세상이 어떤가 하구 해볼라 그랬어요.


친구들은 밭을 갈고 농사를 져도, 나는 싫어서 안 배웠어. 기회는 있는데두 내가 하질 않으니까는…아버지 연세는 들어가시고, 진짜 우리 아버님 엄중 엄하셨어요. 아주 일을 홑하게, 건성으로다 배우는 건 그건 금방 알거든. 일하시는 분들은. 할 재(때)는 야무지게 뭐를 해두, 그 때는 아버지가 일을 하시니까는 일을 다니면서 도와드리는거지. 어떤 때 ‘내가 뭐 죽을 때까지 밭을 가냐? 한 번 해 봐라. 이놈들아.’이래서 뭐, 어떡해라 어떡해라(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된 거지(배운 거지).

 

아버진 진짜 아주 가난했어, 진짜. 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진 않다구 그런 거예요. 아버지한테 그건 잘 배웠어. 누가 오면은 술 있으면 술 한 잔 나눠 먹고, 그거는 아버지한테 내가 잘 이임을 받은 거 같애. 베풀구 하는 거. 어른들 계실 적에는 식구끼리 밥을 먹은 적이 별루 없어요. 아침은 먹는다 할지라두, 점심, 저녁은 우리 집안끼리 먹는 적이 별루 없어요. 하여튼 타인이 누가 오시든지 간에 오니까…우리 집사람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리구서 아버님이 새롭게 계모를 데꾸 오셨는데, 그 분이 참 잘 하셨어. 진짜. 그런데 친엄마와 계모의 차이점이 있다구 그러면은…나는 이 집이 천천지 같은 저거야. 내가 학교를 가야 되는데, 68년도에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갈려다가. 우리집이 진짜루다가 춘향이집(초라한 집)이야 내가 태어난 집이. 이 집이 아니구, 이 집은 69년도에 진 거고, 옛날 진짜 초막집이지. 아버지두 뭐 집이 번듯하게 짓고 싶었겠지만, 남자라면 뭐 그런 포부는 있잖아요.


계모가 올 때, 집이 너무 초라하니까는 집을 좀 짓고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학교를 간다고 하니까는, 나는 7학년을 다녔어. 우리 초등학
교 동기가 62명 중에서 진학하려는 사람은 열두세 명 밖에 없었어. 그 중에 내가 꼈다고 학교를 가겠다고.


집짓느라 진학포기하고 고향에서 농사

그 때 담임선생님이 참 아쉬워했는데, 내가 진학을 못한 거야. 69년도에 내가 학교를 가겠다고 그러니까는, 아버지는 말리구, 어느 한 사
람은‘형님, 호성이 그래두 학교는 보내셔야 됩니다.’그러구, 엄마는 집을 질라구 원하구, 나를 학교를 보내면 이 집을 못 짓는다는 거지
요. 낮에는 아버지가 학교를 보낸다, 밤에는 또 안 돼. 참 내 그 고통을….


손양숙 선생님이라고 품안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야. 진짜루다가 그 선생은 6학년 담임이야. 선생님을 내 찾아가서 작년에 진학을 못했는데, 올해 학교를 가고 싶다구 그랬더니 선생님이 책을 날 줬어. 그래서 내가 그 선생님 책을 가지고 1학기를 딱 뗐어. 아버지가 엄마랑 그 다음서부터 안 된다는 거야. 1학기 방학이 됐는데, 아버지가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는, 아, 난 그 때 아버지 지금도 원망이…. 가방은 무슨 가방이 있어. 그 땐 그냥 책보지. 그걸 통째로 아궁이에다 넣어 버린 거 아냐. 그 때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건 아직까지도 그래. 그래서 난 바깥세상을 대문턱
을 넘었다 와 본적이 없어요. 그리고도 농사를 안 배우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워낙 무섭고 그러면서도 낙지(나가지) 못 했어. 마음이 약한 거지.

 

kim1.jpg 마을 도박퇴치에 앞장서며 4H활동
어렸을 때 친구 많았었어. 내가 여기서 결혼하고, 여기서 애들을 둘을 다 낳구, 그러기 전에 총각 때, 마을두 새로운 변화에 저걸 해가지구, 옛날에 4H라는 게 있었어. 4H 봉사활동 청년단이 마을마다 다 있었어요. 품걸리가 소양댐 저거 돼 가지구, 70년서부터 78년, 그 때가 도박의 왕국이었어. 소양댐 보상 받은 돈들. 화전민 등등 해가지구, 그거를 노리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내가 75,6년도에 4H클럽을 조직해 가지구서, 그 때는 마을 회관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여기(내집) 사랑방에서 발족을 했어. 여기 벽에다가 빙 돌아가면서 4H 마크, 4H 표어, 사랑방 여기다가 20명 가까이 됐으니까….도박을 뿌리 뽑아야 되겠다.‘ 도박없는품걸리.’표어를 만들었어. 깨끗한 거리 등등‘도박신고는 번영 4H’, 4H 이름이 번영이었거든.

 

아주 배루다 들어오니까는. 막 배에. 전 이장이 우체부를 했는데 (도박꾼이) 왔다구. 그러면은 잠복근무 들어갔어. 조별루. 워낙 인원이 많으니까는, 한 개조에 네다섯 명씩. 나는 맨날 여기서 하니까는 나는 매일이지.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른들 고개를 꺾어 버렸어, 완전히. 하여튼 싸우다가, 지금 문짝은 부서지지도 않지. 그전엔 창호지문 다 부서지고… 전 이장이 아버지가 도박꾼이었어. 우리가 (도박을) 말린 데니까는 밀어줬어. 빽이 좀 있었지. 이장 빽이. 이장님이‘중간에 포기하겠다면 시작도 하지 말고, 끝까지 하겠다면 내가 밀어주겠다.’그랬지.


구멍으로 들여다보니까는 시간이 돼야 되는데, 처음엔 뻥을 쳐. 술내기를 한다구. 돈을 봐야 덮치지. 숨어서 보다가 오줌을 싸는데, 오줌두 맞구, 싸움 나서 술병으루두 맞구, 머리가 쫙 갈린 놈들두 있구…. 도박판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동네에두 많아. 동네 사람에다가 외지에서 한 두 명 들어 오면 성립이 금방 돼. 소장사가 있는데, 돈이 떨어져 소를 담보로 돈을 꿔. 낱가리 담보루다가 돈을 줘. 그리고, 소 실려 나가구, 낱가리
떨지도 않은 걸 그대로 싣구 가구. 그래서‘이거는 아니다.’해서 한 거지. 내가 진짜 고생도 많이 했구.


품앗이로 힘보태며 어울려 사는 마을
난 이제 나가면 못살아. 내가 지금 이 우체부 일을, 이거 공무원 근무한 게 20년이 넘었으니까는. 옛날에 나오라구 했는데, 아유, 자유로
운 생활하다가 남한테 구속하구, 뭐 이런, 시간 구속하구 당하구. 힘들어 가지구 나오래두 못나가.


다 같은 집안들이지. 또, 내가 이장을 맡고 있다 보니까는. 또 어려운 사람들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끌고 가야지. 누구하고 가깝고, 뭐 그런 거 없어. 22가구. 전원농은 15-16 그거 밖에 안 돼. 나머지는 여름에만 와 있구, 겨울에는 생활권이 그렇구(좋지 않고).

 

유일하게 옥수수 농사짓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지금 문 앞이니까 밤새도록 보초서구, 뭐 야간에 못 나가구, 두 번은 잠을 자냐구. 어유, 일찍 들어오면, 10시 전에두 들어오는데, 10시 반에서 12시 전. 밤 2시에서 4시 사이. 그거 후레쉬 가지구 보초서구, 그러면서 조거 건진 거예요. 앞에 거. 꽤 많이 잊어먹구. 그나마 그러는 바람에 나만 살린 거야. 작년엔 저 밑에다 했다가 돼지 다 주구. 하나도 못 건지구.


그래 이번에는 문 앞에다가 한 거지. 아침에는 6시 전에는 나와야 되는데 소여물을 해 주면은 소가 먹는 시간이 40분 걸려요. 그리구 밥 먹는 게 6시 40분, 50분 돼야 먹는다구. 마구 설거지하구, 닭 줘야지, 개 줘야지. 아침에 일 갈 적에는 6시 반에 밥을 먹구. 아니면 7시쯤 밥을 먹지. 밭농사가 한창일 때는 4시에 일어나지.


잣이 작년하구 올해 따는 경우가 힘들어. 이런 게 내 생애 처음이야. 작년에 땄는데 올해땄다는 건, 그 영향이 지금 기후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신호야.


나는 집을 두구 돌려가며 밭이 있으니까, 밥은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지. 밭이 먼 사람들은 밥 싸가주구 가지. 노동력이 부족하니까는 예를 들어서 5월 달에 콩을 심겠다 하면은, 몇몇 사람이 토의를 하지.‘ 니가 먼저 할래? 자네가 먼저해. 내가 야중 할게.’이런 식으로…서로 맞춰야지. 그게 품앗이야.


겨울에도 바빠요. 술 먹는 것도 바쁘구. 나같은 경우에는 태양열을 만들어 보일러를 하지만은, 일반인들은 화목 보일러야. 나무를 해야 만이 겨울을 날 거 아니야. 겨울에는 큰 저거는 없어요. 가축하는 사람들은 가축하고 좀 한가하지. 겨울에는 눈 오고 그러면은 회관에서 많이 생활해요. 잿간 이거는 우리 진짜 우리 역사 대대손손 내려오는, 지금은 화장실 그러잖아요. 옛날에는 변소, 뒷간 그러거든요. 저건 잿간이지. 여름철 같은 경우에는 파리와 구데기 진짜 일을 보구두 찝찝하구 그랬거든요. 근데, 재루다가 사용을 하면은 그런 게 없어요. 재는 알카리성이거든요. 사실은 그것을 사람의 용변과 혼용을 시켜줬을 때 거기서 발효가 된다 그러면은 엄청난 퇴비가 되지요.


품걸리만의 그게 아니라, 옛날에 4H 한창할 적에 어디나 다 했었어. 콩쿨 대회, 노래자랑, 연극 그게 한참 물오를 적에 행사루다가 화전민 떠나면서 사람두 없구 쓸쓸하구 그러니까 사라진 거지. 옛날에는 추석 때, 오월 단오. 추석놀이를 엄청 심하게 했어요. 그럴 때는 구경 온다구 그러구. 각처에서 다 왔지. 대단히 성황을 했었지….


구술정리 심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