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맛이 담긴 순대

2012.06.26 02:45

문화통신 조회 수:2541

sun2.jpg 적절한 분류는 아니지만 순대로 갈라보자면 여자들은 두 부류다. 순대를 잘 먹는 여자와 절대 먹지 않는 여자. 나는 순대를 절대로 먹지 않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순대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순대는 내 입맛에 그다지 맞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파는, 당면 듬뿍 넣은 순대는 어쩐지 느끼했다. 그나마 서울에 살 땐 신림동 순대볶음을 즐겨 찾긴 했지만 질겅질겅 씹히는 껍질의 느낌이 싫어 순대 껍질을 벗겨 먹었다. 

 

순대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시집와서다. 남편의 고향은 홍천 서석이다. 시 작은 아버님께서 고향 땅을 지키고 살고 계셔서 명절을 그곳에서 쇤다. 시집 와 첫 설 명절을 쇠러 갔는데 거기서 희한한 풍경을 만났다. 아버님들과 그 아들들은, 순대 소가 담긴 커다란 함지를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돼지 창자를 주무르고 있었다.
마치 어떤 임무라도 수행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돼지 창자에 깔대기를 대고 양념한 소를 긴 꼬챙이로 찔러 넣는 모습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치 신기하기도 했지만, 경악할 만큼 징그러웠다.
하지만 두어 시간 후 그 징그러운 느낌이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순대의 맛이 지금까지 먹어봤던 질겅질겅 씹히는, 느끼한 시장 순대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시 작은 아버님은 명절 며칠 전 항상 그 동네에서 직접 잡은 돼지 창자와 부속물들을 사오신다. 그것을 깨끗이 씻고 80~90cm 길이로 잘라 한 쪽을 묶은 뒤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 들깨가루, 된장과 갖은 양념을 해 버무린 소를 집어넣는다.
그것을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핀 가마솥에 찐 후 뜨거울 때 껍질을 훌훌 훑어 내리며 들기름을 발라준다. 들기름 바르다 손바닥을 다 델 지경이지만 어쨌든 잠시 후 먹을 순대 맛을 생각하면 그쯤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시댁의 순대 맛은 인스턴트 느낌의 시장 순대 맛과는 거리가 멀다. 고소하며 담백한 맛에, 씹는 느낌은 폭신하다고 할까. 아무튼 감칠맛이 끝내준다.
더 특별한 것은 순대를 찍어먹는 소스(?)다. 보통 순댓집에서는 후춧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은 소금이나 새우젖에 순대를 찍어먹는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조선마늘을 잘게 다져넣은 집고추장에 순대를 찍어먹는다.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은 태양초 고춧가루로 버무린 고추장은 순대 맛에 신천지를 안겨준다. 고추장의 얼큰함과 순대의 고소함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어찌나 맛있는지 이미 불러있는 밥 배와는 상관없이 끝없이 젓가락이 가 닿는다. 

 

시댁에서 순대의 맛을 알고 나선, 순댓집을 종종 찾는다. 때로는 유명하다는 집을 찾아다니며 맛을 비교하고 품평까지 한다.
속초 아바이 순대, 충남 병천 순대, 제주 순대, 개성 순대, 경기도 용인 백암 순대 등 지역에 따라 순대도 여러 가지다. 종류에 따라 맛이 비슷할 것 같지만 집집마다 다르다. 강원도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아바이 순대나 병천 순대는 특히 그렇다. 제대로 골라 찾아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낭패다. 정체성 잃은 순대 맛에 실망만 한 가득이다. 

 

순대는 서민 음식이다. 몇천원짜리 순댓국 한 그릇에 뜨끈하게 속이 풀린다. 술안주로도 제격이고 배까지 두둑이 찬다. 영양 보충에도 그만이다. 아이들에게도 속을 꽉 채워주는 간식거리다.
만들기 복잡하다는 것만 빼고 이러구러 좋은 점만 많으니 고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순대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것일 게다. 나로서도 이제는 순대를 먹지 않는 친지들을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순대에 맛을 들였다.

 

내일은 점심에 순댓국 한 그릇과 모듬 순대 한 접시 찜. 순대에 대해 읊조리자니 순대가 무척이나 당기는, 나의 창자엔 꼬르륵 소리만 꽉 차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