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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은 올리브기름을 듬뿍 치고 아기 조개를 얹은 파스타를 먹었습니다. ‘파스타’라 그래봤자 뭐 거창한 음식이 아닙니다. 그저 서양 국수죠. 나는 막국수, 칼국수, 잔치 국수, 냉면 같은 면을 좋아합니다. 서른다섯 살에서 마흔을 넘길 때까지는 하루 한 끼씩을 먹었는데, 그 때도 점심에는 국수를 먹었습니다.
국수는 젓가락으로 먹습니다. 물론 올챙이 국수라고, 강냉이를 갈아 만든 국수는 숟가락으로 먹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국수를 젓가락으로만 먹는데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숟가락을 놓아두고 국수를 먹습니다. 크게 숟가락 쓸 일이 없는데도 말이죠.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포크가 동물의 '발톱'이라고 했습니다. 나이프와 포크는 고기를 찢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흔히 고기를 '썬다'고 하지만 그건 점잖은 표현이고 사실은 '찢어발기는'것이죠.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이 고기를 찢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고깃덩어리가 찢겨질 때 그 사이에 '식욕의 불꽃'이 타지 않습니까? 찢어 먹기 위해,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 그들은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거죠. 그러나 젓가락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것은 결코 찢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쪼는 것입니다. 새가 모이를 쪼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한 사람도 롤랑 바르트입니다. 젓가락은 새의 부리와 같은 겁니다. 젓가락질에서는 '식욕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포크는 달랑 한 개만으로 모든 해체를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젓가락은 한 개로는 그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젓가락은 짝을 이루어 융합에 나섭니다. 젓가락은 갈라져 있는 것들, 따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것들을 짝지어 주는 문화입니다. 들어 보시지요.

 

십이월분디(山諔)나무(산초나무)로 깎은
아아, 진상할 소반 위에 있는 젓가락다와라!
님의 앞에 들어 가지런히 들어 열렸더니
손(客)이 가져다가 무는 군요.
고려가요 -동동-

 

‘동동’에서 젓가락은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가지런 하다든가, 열렸더니(交合)하는 표현들은 남녀가 짝을 짓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젓가락은 짝의 문화입니다. 남녀 교합의 오글오글함이 있지만, 이 교합은 패러랠리즘(parallelism-평행구조)에서 비롯됨으로 성애적(性愛的)상상을 넘어섭니다. 그런데요, 이 젓가락은 둘이 평행과 교합으로 완성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층 더 완성된 상태로 자신을 끌어 올립니다. 젓가락 옆에 짝처럼 숟가락을 놓는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시대의 새로운 사랑법인 폴리아모리(Poly Amory-다중애)를 닮았습니다. 이 둘과 하나의 교합을 ‘수저’라 하고 이런 다중교합을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애시 당초 우리의 음식은 국물과 건더기로 그 균형을 이루고 융합되어 있잖아요. 모든 사물에 빛과 그늘의 양면이 있듯이, 김치 깍두기를 비롯해서 우리네 음식은 서양 샐러드나 일본의 단무지와는 달리 건더기와 국물의 음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건더기인 양(陽)은 젓가락이 맡고 국물인 음(陰)은 숟가락이 맡죠. 숟가락은 움푹해서 여자고(음) 젓가락은 길쭉해서 남자(양)입니다. 결국 수저란 남녀의 교합이고, 모자(母子)이고, 고체와 액체의 결합이며, 소극으로 변장한 가장 적극적인 에로티즘(Erotism)이며, 정신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입니다.
내가 국수를 젓가락으로 먹으면서도 숟가락을 곁에놓아 ‘수저’를 이룬 다음에야 국수를 먹는 뜻은 ‘엄마(陽)의 젖을 빨던 내(陰) 생애 최초의 식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허태수 춘천성암교회 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성찰적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포기>, <영혼의 약국>, <사람이 중심이지요>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