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미감 생명의 곡선, 논두렁

2015.07.17 18:55

문화통신 조회 수:415

생명의 곡선.jpg

사진 김남덕

 

내일 모레면 나도 육십 줄이다. 물론 사사오입을 넉넉히 해야 하지만, 그러다보니 가끔은 나도 모르게 살아온 햇수를 헤아리게 된다. ‘나이를 헤아린다’는 말은 ‘나는 어디서부터 흘러와 여기 있나?’와 같은 물음이다.

 

산골에는 ‘보메기’라는 게 있었다. 논농사를 같이 짓는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논으로 가는 물길을 다잡는 일을 말하는 거다. 산기슭을 논으로 일궈 천둥지기를 삼다보니 봇도랑을 만들어 계곡물을 끌어들여야했다. 이 일이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고, 1년 농사에 너덧 번은 보메기를 해야 했다. 봄에 못자리 할 때 한 번, 가뭄이 드는 5월에 한 번, 홍수가 나서 봇도랑이 망가지면 또 한 번, 벼 이삭이 팰 때도 한 번 더 보메기를 해야 했다. 날이 푹푹 찌고, 돌과 바위와 절벽을 돌아 만리장성 같은 물길을 내자니 죽을 힘이 들었지만, 콸콸 흐르는 봇도랑에 발을 담그고 보주(보메기꾼의 대표)가 내는 농주 한사발에 고달픔과 시름이 싹 가셨다.

 

이제는 농지구획에 의해 직선으로 되어 버렸지만 봇도랑을 닮은 옛날 논두렁은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길이 되기도 하고 둑이 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옛적 그 봇도랑과 이어진 논두렁과 논길들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붓으로 써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지나온 상형이며 현재의 여운(餘韻)이다. 그런데 이 여운이 가끔 어지러움을 느낀다. 자(尺)를 대고 그은 것처럼 획일화된 논이 나타날 때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볼일이 있어 운전면허 시험장엘 가는데 바둑판같은 논배미가 나타나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보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선만 하더라도 ‘나’의 지난 논두렁 형상과도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유연한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란 사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위적으로 빚어진 선이다. 그럼에도 저 샘밭의 바둑판 논길처럼 직선이 아니지 않은가! 강과 산맥처럼, 마치 봇도랑을 내듯 그렇게, 논두렁을 내듯 유연하게 그어져 있다. 가장 인위적인 국경선도 이러할진대. 그래서 나는 그 직선으로 이루어진 논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울렁거림 아니, 구토에 가까운 어지럼을 느낄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저 네모반듯한 논길은 미국사람이 건너와서 내 줬거나 아니면 미국 사람을 본떠서 한 짓일 거’라고 말이다. 나는 뭐 학교 다닐 때 ‘사회과부도’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세계지도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미국 지도는 자를 대고 그은 바둑판같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 알았지만 이게 미국 문화이고 근대 산업주의의 표상이다.

 

벼농사는 밀농사와 다르다. 비행기가 씨를 뿌리고 트랙터가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기계영농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논농사’의 숙명이다. 묘판을 만들어 키우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모내기를 하고 김을 매어 잡초를 자라지 않도록 돌보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더군다나 물고를 텄다 막았다 하면서 수량을 조절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다랑이 논과 꼬불꼬불한 논두렁, 거기서 구푸렸다 일어났다 하는 우리 농민을 보고 ‘농사(農事) 짓는다’고 하지 않고 ‘원예(園藝) 한다’고 했다. 이렇게 봇도랑과 논두렁은 ‘나’의 정신문화와 생래학적 유전자이다.
생물학에서 유전자 변이는 종종 중증자폐아의 출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문화적이고 생래적인 유전자는 변이를 일으켰다. 그래서 때때로 구토증세가 발현하는 것이다. 두 배의 수확을 위해서 농토를 늘리는 확장책, 그 기술이 개간법이고 그 법의 이념화가 ‘서양의 문화’다. 한 때 유럽이 제국을 일으킬 때 썼던 그 개간법, 팽창과 식민주의 그리고 이른바 미국의 개척정신에 그만 ‘나’의 유전자도 변이를 일으켰다.

 

달포 가까이 중동호흡기증후군으로 인해 애 어른 할 거 없이 벌벌 기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전부터 구토와 호흡곤란, 심한 가래와 기침, 펄펄 끓는 체온으로 인해 사경을 해매고 있다. 물론 파라독스(paradox)다. 논두렁의 아름다움, 봇도랑의 미학은 팽창주의나 기능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의 곡선이다. 그런 ‘나’의 존재론적 상형이며 생명의 여운이고 유전자인, 예술과 정성으로 펼쳐지는 ‘보더라인 border line’이, 팽창주의를 거부하는 선(線)이 눈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기억 속에서 조차 가물가물해지는 것에 대한 역정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론적 면역체계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이 육십 줄’ 이라는 뜻도 그것이다.

 

허태수 춘천성암교회 목사 설교와 함께 글을 통해 성찰적 삶을 일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포기>, <영혼의 약국>, <사람이 중심이지요>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